어린애기 쳇 모슬 땐 솟 그멩이 칠헌다
어린애기 쳇 모슬 땐 솟 그멩이 칠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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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의 借古述今] 197. 어린아기 첫 나들이 때는 솥 검댕이 칠한다

* 쳇 모슬 : 첫 나들이
* 솟 그멩이 : 솥 검댕이(솥 아래 까맣게 앉은 그을음)

출처=제주학아카이브.
좋은 게 좋은 것, 해오던 관습대로 해서 나쁠 게 없다. 솥 검댕이를 이마와 콧등에 툭툭 찍어 바르고 나들이 다녀오면 되는 것을, 그걸 소홀히 했다 ‘동티’가 나면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잖은가. 심하면 생명을 잃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진은 1971년 제주에서 촬영한 금줄. 출처=이토 아비토, 제주학아카이브.

옛날 갓난이 외출할 때는 아무렇게나 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해 오던 관습이 있었다. 출산하면 집 입구에 금줄을 띄워 사람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혹여 잡된 사람이 드나들 수도 있거니와 조심하지 못해 몹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있어, 귀한 자손에게 좋지 않은 잡귀라도 범접할세라 여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는 솥 강알(밑, 아래) 새카맣게 눌어붙은 그을음, 즉 솥 검댕이를 일정 분량을 긁어내어 접시에 놓고 물에 개어서 아기의 이마나 콧등에 찍어 발랐다는 얘기다. 그렇게 함으로써 첫 나들이 하는 갓난이가 집을 나가 길을 오고 감에 범접하는 게 없어 아무런 탈 없이 집에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해 보는 것이 아니다. 신중히 성의껏 절차에 따라 흠 잡히지 않게 행했음은 두말할 게 없다. 무성의하게 아무렇게나 해서는 좋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시대에는 ‘웃기는 얘기’라고 실소(失笑) 해 버리겠지만, 옛날에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동티’란 말이 있었다. 조금만 무슨 일에 조심성이 없어 약간 탈이 생길 때, 갑자기 이마에 열이 끓거나 식은땀이 나거나, 알 수 없는 증상으로 머리가 어지럽거나 그래서 몸져눕거나 하는 경우는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동티가 난’ 것이다.

바닷가에서 물결에 쓸려온 널빤지를 주워온다든지, 길을 걷다가 이상한 돌멩이 하나를 가지고 집에 왔다가는 어른한테 욕을 사발로 얻어먹었다. 동티가 붙은 것이라 했다.

해선 안된다고 금기시해 오는 행위를 했을 때, 귀신을 노하게 해서 받는 재앙이 ‘동티’(動土)다. 동티가 나면 대개 질병으로 나타나고 심하면 죽는 수도 있었다.

동티가 나는 이유가 있었다. 신체(神体)를 상징하는 물체와 귀신 붙은 것, 그런 자연물이나 인공물을 멋대로 훼손하거나 침범하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다루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게 동티다.

이런 경우, 신이 진노해 벌을 내리거나 정해진 종교적 질서를 깨뜨리게 됨으로써 그 자리에 사악한 잡귀가 침범하므로 동티가 나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원시종교와 주술(呪術) 원리라 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어떤 존재의 힘이 강하게 표출되는 ‘살(煞)’이다. 악독한 귀신의 짓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서낭당을 헐어 버리거나 장승을 불태웠다가 벌을 받아 죽었다는 등의 얘기다.

나무도 함부로 톱질하지 못했다. 또 땅을 팔 때에도 일진을 살펴서 손(損)이 없는 방향에서 행해야 하며, 묘를 쓰거나 이장(移葬)하거나 집을 수리하는 등등 큰 작업을 치를 때는 반드시 산신제나 지신제를 올리도록 관습적으로 돼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일정한 절차나 금기(禁忌)가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않았을 경우, 그냥 지나가지 않고 동티가 난다고 믿었다.

일단 동티가 나서 병을 앓게 됐을 때, 치료하려면 당연히 동티를 잡아야 한다고 여겼음은 물론이다. 동티를 해결하는 데는 정해진 방책이 있었다. 심방(무당)을 초대해다 푸닥거리를 했던 것이다.

‘어린애기 쳇 모슬 땐 솟 그멩이 칠헌다.’

좋은 게 좋은 것, 해오던 관습대로 해서 나쁠 게 없다. 솥 검댕이를 이마와 콧등에 툭툭 찍어 바르고 나들이 다녀오면 되는 것을, 그걸 소홀히 했다 ‘동티’가 나면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잖은가. 심하면 생명을 잃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세상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격세지감이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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