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79. 오에 겐자부로, ‘만엔 원년의 풋볼’, 박유하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7

오에 겐자부로, ‘만엔 원년의 풋볼’, 박유하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7

1. 굿바이 트럼프

드디어 미국의 대선 투표가 끝났다. 투표는 끝났지만 미국이 다시 정상(?) 국가로 되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국제무대에 데뷔시킴으로써 한 때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의 네티즌들은 트럼프에게 ‘트황상’이라는 애칭까지 부여했지만 트럼프는 결국 우리에게 별 소득을 가져다주지 못한 채 물러나게 되었다. 트럼프의 재직기간 동안 미국의 흑백 갈등은 심화되었고, 이민자나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도 심해졌다. 혐오를 부추기는 트럼프의 발언이 SNS를 통해 급속히 유포되고, 코로나 사태 속에서 트럼프가 보여준 행보는 반지성주의를 퍼뜨림으로써 지금도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혼란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트럼프라는 인물에게 돌리는 것은 인과 관계를 잘못 짚은 것일지 모른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미국은 이미 충분히 망가져 있었고, 트럼프는 거기서 기원한 절망을 폭력적으로 대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경제적 양극화 때문에 희망을 잃은 백인 노동자들은 기존의 정파들이 젠더이슈와 환경문제 등에 집중하는 동안 아무도 자신들의 문제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존의 질서를 깨부술 행동대장을 필요로 했고 트럼프는 그 적임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트럼프가 미치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판을 뒤엎기에는 덜 미쳤다는 사실을 인지한 지지자들이 등을 돌린 결과일 수도 있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은 권력을 주고받는 시소게임을 지속하면서 1%가 99%를 지배하는 현재의 질서를 유지하고 싶어 할 것이다. 바이든은 미국의 대다수 노동자들의 절망을 없애기에는 역부족일 것이고, 폭력적인 힘은 억제된 채 잠재적인 위험으로 상존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폭력은 사실은 더 근원적인 폭력에 맞서는 한 가지 방식일 수 있다. 인간은 저마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희망을 좌절시킨다. 세상에 존재하는 억압, 차별, 지배, 불평등, 궁핍 등등은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폭력이다. 우리를 압도하는 그런 폭력적인 힘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무력해지고 왜소해진다. 그런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인 것으로 여겨진다. 즉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죄이며, 그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힘은 보잘것없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서는 나보다 강한 어떤 존재가, 나를 대신해서 세상의 악을 물리칠 영웅이 필요하다. 그 영웅은 나를 대신해서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웅으로 하여금 세상의 폭력에 맞서는 폭력을 행사하게 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2. 자기 파괴와 구원의 문제

199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박유하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8)은 세상의 근원적인 폭력에 맞서는 인물들에 대한 서사이다. 제목이 마치 만엔 정도 걸고 축구 경기를 하는 명랑한 스토리일 것 같지만, 이 소설은 매우 폭력적이고 암울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만엔 원년(万延 元年)이란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메이지 유신의 해인 1860년을 일컫는다. 풋볼은 1960년에 고향으로 돌아간 전향한 학생운동가인 다카시가 동네 청년들을 모아서 집단행동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할 뿐 소설 속에서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는 1960년의 풋볼이라고 하지 않고 만엔 원년의 풋볼이라고 제목을 정했다. 풋볼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작가는 100년을 관통하는 근원적인 폭력의 역사를 말한다. 1860년에 봉기한 농민들의 분노가 1960년의 풋볼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소위 정상적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없다. 작중 화자인 미쓰사부로는 두려움과 분노로 패닉에 빠진 초등학생 무리가 던진 돌에 맞아 한 쪽 눈을 실명한 장애인이다. 왜 초등학생 무리가 두려움에 빠져서 돌을 던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그래서 그는 “그 사고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10쪽) 게다가 그는 친구의 엽기적인 자살 때문에 정신적인 혼란에 빠진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겪는 세상으로부터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에 겐자부로가 뇌가 비정상적인 장애인 아들을 둔 것과 같이, 작중의 미쓰사부로 역시 뇌에 혹이 달린 채 태어난 아들을 가진 것으로 설정된다. 미쓰사부로의 아내는 장애인 아들을 시설에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알콜중독자가 된다. 소설 속 사건의 핵심 인물이자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미쓰사부로의 동생 다카시는 미국과의 안보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인물로서 패전 직후 조선인들에 의해 형을 잃는 등 가족의 해체라는 아픔을 겪은 인물이다. 나중에 그의 고백을 통해 밝혀지지만 그는 여동생을 성폭행함으로서 자살로 내몬 가해자이기도 하다. 

세상의 끝에서 절망에 빠진 이들은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함께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찾기로 한다. 그러나 그들이 찾은 고향은 세상의 폭력에 무력해진 절망적인 사람들의 집합소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제도적인 폭력의 정점에는 동네에서 유일한 슈퍼마켓을 통해 마을을 지배하고 있는 ‘슈퍼마켓 천황’이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인인 그는 마을에 필요한 생필품을 관장함으로써 마을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다. 만엔 원년의 농민들이 지주에 의해 수탈당함으로써 절망적인 삶 속에서 고통을 당한 것처럼, 골짜기 마을의 사람들은 슈퍼마켓 천황의 지배하에 무기력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카시가 마을 청년들을 모아 풋볼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세상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달라는 암묵적인 요청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다카시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가 마치 만엔 원년의 농민 봉기에 앞장섰던 증조부의 동생이 완성하지 못했던 과제를 마무리하라는 명령인 양 여기기 시작한다. 다카시는 세상을 파괴하고 끝내 자기 자신을 파괴함으로서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기 시작하고 관찰자인 미쓰사부로는 그에게서 깊은 절망의 냄새를 맡는다. 그는 점차 미쳐가는 다카시를 보면서 세상의 폭력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던 것과는 정 반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 생활, 풀의 집, 그것은 이 골짜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고립무원한 상태로 희망의 징후는 조금도 찾지 못한 채, 동생의 귀국 이전보다도 명백히 그 강도가 커진 절망적인 시간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경험의 의미를 전부 안다.” (283쪽)

미쓰사부로는 근원적인 세상의 폭력에 맞서는 방법으로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위한 희망에서가 아니라 자기 파괴의 절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풋볼 팀을 폭력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마을 전체의 봉기를 꾀하는 다카시에게 그런 폭력의 유효성에 대해 질문하고 다카시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어떤 유효성을 위해서냐고? 하하. 형은 친구가 목을 매고 죽었을 때, 그분이 무슨 유효성을 위해 죽었는가 하고 생각했어? 또 형은 자신이 어떤 유효성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어? 골짜기 마을에서 새로운 형식의 봉기가 달성된다 하더라도 그 어떤 유효성도 없을지 몰라. 하지만 적어도 나는 증조부님 동생의 정신을 가장 깊게 실감할 수 있을 거 아니야? 그건 내가 오랫동안 열망해 온 일이지.” (370쪽)

다카시의 이런 대답은 결국 자신이 열망해 온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극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대답 밖에는 될 수 없고 파괴적인 폭력의 유효성에 대한 답으로서는 지나치게 사적이다. 다카시 자신이 골짜기 사람들이 단지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 다카시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열망은 자기 파괴에 대한 욕망일 뿐, 세상의 폭력에 대한 답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유효성을 위해 살아가고 있느냐는 다카시의 절망적인 물음에 대한 답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다카시의 자살을 앞에 두고 “나는 스스로에 대해 보통 이상으로 무력하게 느꼈고 그 무력감은 한기와 함께 점점 속도를 붙여가며 바닥을 모를 정도로 깊어져갔다”(550쪽)는 미쓰사부로의 독백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의 대안은 “지옥도에 정착된 붉은 ‘위무’는 자신의 지옥을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극복해가는 무서운 사람들의 위협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면서, 어두컴컴하고 불안정하며 애매한 현실 생활을 얌전하게 살아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자기 위안을 위한 빛깔”(551쪽)이라는 문장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어두컴컴한 현실을 얌전하게 살아나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세상의 폭력에 맞서 자기 파괴의 욕망을 물리쳐야 하며, 절망을 견디는 힘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억압과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세상의 폭력은 우리를 늘 위협할 것이다. 누군가의 폭력으로 그 폭력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기 파괴적이다. 트럼프와 같은 지도자의 등장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는 절망한 무서운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 지도자의 퇴장은 이제 각자가 어두컴컴하고 불안정한 현실을 얌전하게 살아야 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얌전하게 자기 위안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파괴적이지 않은 힘 속에서 대안을 찾지 못한다면 폭력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찾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구원은 위대한 사람들의 거대한 폭력을 통해서보다는 얌전한 사람들의 작은 위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오에 겐자부로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겐자부로의 이러한 대안을 공동체에 대한 희망과 연결 짓고 있지만, 지나치게 소극적인 이런 태도는 다자이 오사무나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일본 지식인 특유의 허무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연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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