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공간 오이 연극 ‘갈매기’

곤충, 갑각류 같은 생명체에게 탈피(脫皮)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제3자가 바라보면 그저 단순 껍질을 벗는 행위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탈피는 ‘이 과정을 넘지 못하면 생사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고비다. 인간에게도 탈피라는 말을 쓰곤 한다. 신체 보다는 내적인·정신적인 성장을 주로 탈피에 비유한다.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의 대표작 <갈매기(Chaika)>에서 25세 작가 트레플료프 역시 고통스러운 탈피 과정을 겪는다. 유일한 피붙이 어머니는 유명 작가인 애인을 자신보다 챙기고, 공들여 준비한 연극은 어머니의 조롱으로 망쳐버렸다. 설상가상 연인 니나는 그 유명 작가와 눈이 맞아 자신을 떠났다. 

<갈매기>는 희망과 좌절에 웃고 우는 인물 구조 속에, 1898년 초연 이후 연극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되는 등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20년 11월 제주 극단 ‘예술공간 오이’가 만든 연극 <갈매기>는 매끄러운 각색과 섬세한 연출의 옷을 입고, 한 인격체의 거친 성장을 보여준다. 

연극 '갈매기' 출연진들. ⓒ제주의소리
예술공간 오이의 연극 '갈매기' 출연진들. ⓒ제주의소리

# 1

오이는 원작 배경인 19세기 러시아를 2020년 한국으로 바꾸고 배역도 일부 변경했다. 호수가 아름다운 한적한 마을은 동일하다. 

등장인물은 총 11명. 주인공 격인 트레플료프는 고수찬(배우 현대영), 그의 어머니 이리나는 고지나(홍서해)가 됐다. 트레플료프의 연인 니나는 이미나(이미연), 이리나의 애인 트리고린은 박준수(이진혁)이다. 이리나의 오빠 소린은 고인수(강영지), 소린의 청지기 샤므라예프와 일꾼 야코프는 각각 홍태훈(이상철), 김인상(오상운)으로 분했다.

샤므라예프의 아내 안드레예브나는 강나리(김지은), 샤므라예프의 딸 마샤는 송민주(김민경), 소린의 주치의 도른은 남다른(남석민), 마샤의 남편 메드베젠코는 구기철(양경호)로 설정했다.

원작대로라면 강나리, 홍태훈, 송민주는 가족이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설정을 깼다. 강나리는 영화배우 이리나의 10년 차 매니저로 탈바꿈했고, 송민주 역시 고수찬의 친구로만 설정했다. 고인수는 퇴직 법무부 공무원에서 전직 국회의원으로 각색했고, 홍태훈과 김인상은 자연스레 보좌관과 운전기사로 변경됐다.

고지나는 원작대로 배우지만 히어로물까지 섭렵한 영화배우로, 박준수는 작가 겸 영화감독으로 현실 보정을 받았다.

연극 <갈매기>의 배역 모두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배경이 서로 서로 얽혀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고수찬은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다. 그것은 숨겨진 자녀 취급을 받아온 고수찬 입장에서 새끼가 어미의 품을 갈구하는 지극히 본능적인 행위다. 하지만 엄마의 관심은 본인 그리고 연하 영화감독 박준수에게 쏠려있다. 한 술 더 떠 박준수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여인의 마음까지 사로잡았고, 자신은 가지지 못한 유명세까지 가지고 있다. 단순 질투라고 표현하기에는 이유가 무척 다층적이다. 고수찬이 박준수의 얼굴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다는 토로는 분명 진심이다. 여기에 송민주가 자신을 사랑하지만 친구 구기철은 송민주를 좋아하는 삼각관계도 추가된다.

고지나는 세 가지 내면을 지니고 있다. 배우, 여자, 그리고 엄마다. 20대 역할도 언제라도 너끈히 소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자신을 꾸미는데 공을 들이는 영화배우. 동시에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명성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환상” 영화감독 박준수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그에게 엄마란 가장 마지막 순위에 놓인 자아이면서, 아들 고수찬을 향한 냉정한 시선으로 귀결된다. 고수찬의 존재를 태어날 때 부터 대중에게 숨겨온 이유다. 

이미나는 예상치 못하게 조우한 선망의 대상 박준수 앞에 마음의 눈이 멀어버린다. 결국 옛 연인 고수찬과 가족, 고향까지 버리고 박준수를 따라 나선다. 하지만 2년 뒤 자신에게 남은 건 이별, 유산의 아픔, 몰락한 직업, 내면의 깊은 상처뿐이다. 고수찬은 변함없이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미나는 여전히 박준수를 그리워하며 주어진 현실로 향한다.

유명 영화감독 박준수는 애인과 찾은 시골 마을에서 순수한 여인 이미나를 만난다. 진짜 사랑을 만난 듯 흥분하지만 결국 고지나 옆을 떠나지 못한다. 이미나를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뒤 아무렇지 않게 다시 그 마을을 찾는다. 

이렇게 <갈매기>는 주요 인물 네 명을 포함해 다른 인물들도 꼬리잡기 하듯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본다.  

# 2

고수찬은 극이 진행될 수록 차분해지는 변화를 보인다. 엄마에게 “어릴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응석을 부리지만, 고지나는 오히려 애인 박준수를 감싸고 아들에게 “식충이”라고 폭언을 내뱉는다. 외딴 마을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나누는 이미나 마저 자신에게 등을 돌린다. 결국 고수찬은 감당할 수 없는 충동에 휩쓸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다행히 부상에 그쳤지만 고수찬은 극 중반까지 구석으로 내몰리며 불안한 처지에 놓인다. 

2년이란 시간이 흘러 고수찬의 마음은 다소 안정을 찾는다. 발표한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으며 ‘천재 작가’라는 호칭도 얻는다. 이런 자신감을 가지고 옛 연인에게 찾아가지만, 돌아오는 것은 문전 박대였다. 지금 같은 유명세라면 깨진 관계를 복구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까. 하지만 성급한 본인 생각 일 뿐, 상처 가득한 이미나에게는 작은 여유조차 없는 상태였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고수찬은 또 사뭇 달라졌다. 마치 어머니와 애인에게 반감을 토해내듯 ‘형식 타파’를 고집하던 예술에 대한 정의는 한층 성숙해졌다. 이미나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지만, 좋았던 기억을 추억하며 옛 연인이 돌아서는 모습을 지켜보는 고수찬의 눈빛에서 내면의 성장을 느낄 수 있다.

작품의 마지막은 원작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원작은 다른 사람이 주인공 트레플료프의 자살을 증언하는 냉정한 결말이다. 트레플료프의 죽음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죽음 속에서 간직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덕분에 작품이 지닌 비극성은 한층 짙게 우러난다.

오이가 바라보는 시점은 다르다. ‘사랑은 우리를 힘들고 괴롭게 만들지만 그래도 사랑은 살게 만든다’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원작은 작가로서 트레플료프의 평판을 깎아내리지만, 오이 각색본은 이런 설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천재 작가 위상을 온전히 유지한다. <갈매기> 각색은 전혁준이 맡았다. 평소 작품 속에서 작은 희망, 기대를 놓치지 않은 ‘전혁준다움’이 읽혀졌다. 

전혁준은 원작 배경인 19세기 러시아를 현 시점에 맞게 꼼꼼히 각색했다. 정치인이란 속박에서 벗어난 고인수의 대사, 고지나가 외우는 박준수의 책 구절, 담배를 꺼내 무는 송민주에게 의사 남다른이 던지는 짧은 말, 배우 매니저라는 강나리 설정 등등… 원작 속 중요한 대사를 제외하고는 지금 정서에 어울리게 다듬고 새로 짜 맞추며 매끄러운 대화를 완성했다. 작품 속 연극 장면을 맨 앞으로 두고, 배경 설명은 몰래 설치한 카메라를 보며 풀어간다는 설정 역시 기발한 발상이면서 자연스러운 진행을 돕는다. 

이미나가 박준수에게 질문을 던질 때 원작과 동일한 “신문”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점차 사장되는 신문이란 용어 대신 ‘포털’ 아니면 ‘언론’이 현대적인 각색 취지에 어울리지 않나 사족을 더해본다.  

# 3

<갈매기>는 고수찬의 성장만큼이나 인물들의 상반된 구조가 읽혀진다. 

여배우 고지나는 무정할 만큼 냉정히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다. 엄마라는 위치는 과감하게 내려놓고 배우, 여자에 몰두한다. 어린 이미나의 등장에 애인 박준수가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여자라는 입지가 위험해지는 상황. 하지만 고지나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이미나가 박준수의 책 구절을 돌에 새겨 건네주자, 고지나는 그 이상으로 다른 구절을 줄줄 외운다. 눈물로 호소하고 소리치고 과감하게 먼저 입을 맞춘다. 마치 ‘정신 차려! 넌 내꺼야! 죽어도 포기 못해!’라는 심정으로 혼신을 다한 설득 끝에 박준수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간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면 무섭게 달려들어 기어코 쟁취해내며, 그에 비해 중요 순서에서 떨어지는 아들이나 오빠 건강에는 관심과 지갑을 닫는다. 매정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누구보다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솔직한 인간의 형상이다. 더불어 고수찬이 천재 작가로 화제가 된 뒤에야 기자회견까지 열어 자신의 아들임을 밝히겠다는 모습은 인물의 권력 지향성을 강조한다.

고지나 반대편에는 이미나가 서있다. 어쩌면 생애 처음 느껴본 두근거림과 떨림을 따라 서울로 향한다. 충동적이지만 순수하다. 이미나는 낯선 도시에서 배우의 꿈을 키우며 유명 영화감독 박준수와 사랑을 만끽한다. 그러나 남자는 이미나 뿐만 아니라 뱃 속 자신의 아이까지 버리고 원위치로 돌아가 버린다. 박준수는 연극에 대해 무시하고, 연극배우를 지망하는 이미나마저 예전처럼 대하지 않으면서 이미나는 배우로서 힘을 잃어버린다. 유산까지 겪고 지금은 전통시장을 전전하며 연기하는 신세지만, 그럼에도 박준수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수찬에게 고백한다. 구렁텅이에 빠진 비참한 상황에도 사랑의 감정, 순간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물. 자신을 옭아매는 과거마저 애써 좋게 기억하는 이미나를 보며 누군가는 답답하게, 다른 누군가는 아련하게 바라볼지 모른다.

주어진 비중은 두 사람 못지않지만 조연급인 강나리-송민주의 구조 역시 흥미롭다. 송민주는 유부녀가 되면 고수찬에 대한 감정을 뽑아낼 수 있겠다 싶어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는다. 그러나 여전히 감정을 지워내지 못한다. 강나리는 돌싱이자 의사 남다른을 수 년 간 짝사랑해온 입장에서 송민주에게 충고한다. 송민주는 화를 내지만 비슷한 경험을 가진 강나리에게는 '한 수 위' 여유가 느껴진다. 

고지나-이미나, 강나리-송민주 구도에 더해 박준수-고수찬까지 묶어 세월이란 성격으로도 비교해볼 수 있다.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는 시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나씩 부딪히고 때로는 후회하면서 전진하는 과정은 이미 고지나-강나리-박준수가 지나온 길이 아닐까. “할 말이 없으면 사람들은 ‘청춘, 청춘……’하고 말하죠”라는 송민주의 일침은 시니컬하고 날카롭다. 하지만 한 눈에 핵심을 꿰뚫어보는 강나리, 내 영역을 지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고지나의 ‘관록’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유명 영화감독과 배우 지망생, 기성 예술인과 신인 예술인 같은 인물 구도는 권력 관계로도 해석된다.

원작에서 트레플료프는 갈매기를 총으로 쏜 뒤, 사체를 니나에게 선물이라고 건네준다. 트리고린은 갈매기 사체를 박제해달라고 샤므라예프에게 부탁한다. 박제가 완성됐다는 샤므라예프의 말에 트리고린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원작은 샤므라예프가 박제품을 보여주는 장면 포함 트리고린의 입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두 장면에 걸쳐 네 번이나 이끌어낸다.  

원작 <갈매기> 속 갈매기 사체는 젊은 연인 간 이별의 상징이자, 사랑의 불꽃을 쫓다가 끝내 타버린 한 여인의 운명과도 같다. 트리고린이 갈매기 사체 박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언행은 어린 여인의 몸과 마음을 취하고 곧 외면해버린 비정함으로 읽혔다. 연극에서는 박제를 언급하는 두 번 장면을 처음 한 번으로 줄였고,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 역시 일상 대화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스스로 삭제하는 박준수의 무심한 성향이 읽혀지지만, ‘박제 사실 부인’ 장면을 더욱 감정을 높여 묘사한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극 초반과 비교하면 후반부 박준수의 역동성은 다소 떨어지기도 하다.

# 4

연극 <갈매기>는 단순한 무대 구성에 아이디어를 덧붙였고, 소소한 부분까지 꼼꼼함을 챙기면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연극 시작을 코앞에 두고 고수찬을 연기한 현대영 배우는 무대 위에서 구석구석을 확인하고 관객들에게 당부한다. 무대 소개가 나오지 않았기에 관객들은 으레 ‘저 사람이 작품을 소개를 하겠구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현대영이 아닌 고수찬으로서 극 속의 연극을 점검하는 연기다. <갈매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갈매기>는 시작한 셈이다. 

작품은 막이 바뀔 때 마다 파란색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분주하게 세트를 바꾼다. 그리고 2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장면에서는 한층 밝아진 조명 아래서 배우들이 세트를 옮기며 동시에 시간 흐름에 따른 연기를 보여준다. 덕분에 관객은 막이 바뀌는 순간에도 무대와 작품에 집중할 수 있다.

가난한 처지였던 고기철은 무채색 작업복을 입고 나오지만, 고인수가 운영하는 회사 관리직을 맡고 나서는 깔끔한 셔츠와 바지, 구두를 신고 나온다. 복장 변화는 “고기철은 가난에서 벗어나면 내가 마음을 받아줄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식의 송민주 대사와 이어진다.  

고수찬의 연극을 볼 때 고지나·박준수의 반응, 연극을 멈추고 뛰쳐나가는 고수찬에게 송민주가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동선 배치, 감정을 폭발하며 박준수를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 때 고지나가 입은 붉은 색 자켓 등 <갈매기>에서는 의미가 담긴 크고 작은 설정들이 발견된다. 원작에서 니나의 유산은 “아이가 있었어요. 아이는 죽었습니다”라는 트레플료프의 짧은 문장만으로 묘사된다. 연극은 이미나가 겪는 극심한 내적 갈등과 하혈을 상징하는 붉은 조명, 고수찬-박준수과 함께하는 몸짓으로 표현했다. 덕분에 이미나라는 인물은 한층 풍부해졌다.

고수찬을 연기한 현대영은 전매특허인 폭발력 있는 연기를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휘했다. 엄마 고지나에게 폭언을 듣고 무너질 때는 연인 이미나에게 느낀 슬픔과 또 다른 깊은 슬픈 감정이었다.

홍서해는 선 굵은 본인 이미지를 한층 살리면서 카리스마 있는 배우이자 여인 고지나로 분했다. 박준수는 이미나를 처음 만날 때와 애정이 깊어질 때, 고지나에게 설득될 때 과정마다 각기 다른 감정을 눈빛에 실어 보냈다. 

이미나를 연기한 이미연은 세상 밝게 웃는 소녀에서 모든 걸 잃어버린 여인까지 극과 극을 오갔다. 김민경은 마치 원작 마샤를 소환한 듯 음울한 감정을 충실하게 옮겼다. 

강영지는 작품을 위해 실제 수염을 기르는 정성과 안정적인 연기로 무대에 임했다. 어쩌면 가장 차분한 인물을 연기한 남석민은 자신보다 20년 가까이 나이 많은 역할을 안정감 있게 소화했다. 고인수의 보좌관을 맡은 이상철은 웃기지 않은 유머로 관객을 웃기는 특명을 부여받아 기억에 남았다. 양경호는 어떻게든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는 소시민 고기철의 비애를 보여줬다.

오상운이 연기한 전직 국회의원 운전기사 김인상은 대사도 많지 않은 작은 역할이다. 하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현실을 잘 반영한 설정 때문이다. 지나가는 말도 또렷하게 기억해서 보고하고, 자신보다 권력이 높은 사람에게는 편안한 일상 대화 중에도 선을 넘지 않는다. 그 외 장면들에서도 윗사람의 지시를 기다리며 수행하는 자세를 보인다. 꼼꼼한 인물 설정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강나리는 각색·연출자의 상상력이 가장 많이 투입된 인물이다. 남다른을 향한 구애의 몸짓은 관객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지만, 송민주를 향해서는 예리한 촉도 발휘한다. 김지은의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빛났다.

# 5

예술공간 오이는 고전 작품을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다. 단순 재현이 아닌 상당한 노력으로 재조립하기에 주목을 받는다. 지난해 7월 안톤 체호프의 <청혼&곰>은 처절한 사랑으로 풀어내면서 파격적인 무대 활용을 시도했다. 기대를 모았던 스웨덴 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1849~1912)의 <미스 줄리>는 안타깝게 코로나19로 무산됐다. 

<갈매기>는 현 시대에 맞게 각색을 했지만 관객, 배우 모두에게 쉬운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복장, 동선, 조명, 대사 하나까지 고심한 흔적을 관객이 찾고, 때로는 고민거리를 전달해 곱씹게 하는 재미야 말로 관객을 위한 정성이 아니겠는가. 나아가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틀로서 창작 보다 더 어려운 고전의 재해석, 소수가 아닌 단원들이 골고루 연출·극본에 도전하는 건강한 흐름은 극단의 경쟁력이다.

20대, 기자 개인을 돌이켜봐도 (지금처럼) 많은 게 부족하고 서툴렀지만 무모한 도전도 기꺼이 감수했던 시기였다.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니었으리라. 25세 고수찬은 가족, 연인, 친구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 유일한 피붙이인 엄마는 그를 계속 외면한다. 꿈꾸는 목표마저도 비웃음 당하기 일쑤다. 목숨마저 내던지는 청춘의 방황.

그러나 죽을 것 같던 고통 속에서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 자아(自我)란 쇠를 달구며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바라보는 목표에 한 걸음씩 올라가면서 성찰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옛 사랑 앞에서 감정이 순간 일렁이지만, 이내 떠나는 상대를 끝까지 지켜볼 수 있다.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 故 신해철의 <민물 장어의 꿈> 가운데 일부

소년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알아갈 때에
하얀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지겠지
나의 오늘이 흘러가면 서글픈 추억들 중에 작은 조각이 되겠지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라지듯 나를 스쳐가네

- 몽니의 <소년이 어른이 되어> 가운데 일부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문득 故 신해철의 노래 <민물장어의 꿈>이 떠올랐다. 내 앞에 놓인 문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깎고 잘라내면서 작아지는 방법 밖에 없는데, 문득 내 모습을 보니 남은 건 자존심 하나 뿐. 그럼에도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앞에서, 지금껏 내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진정한 내가 누군지'를 인생이란 긴 여행을 통해 찾아나선다.

홀로 주저앉아 “난 이름이 없다”고 울부짖었지만, 이제 스스로 자기 이름 석 자를 증명해가는 고수찬의 삶과 노래의 메시지는 많은 부분이 닮아 있는 듯 하다. 

마침 <갈매기>가 시작하기 전과 끝나고 난 뒤에는, 공연장 안에는 밴드 몽니의 2012년 발표곡 <소년이 어른이 되어>가 흐른다. 연출자 김소여가 작품과 맞게 배치한 선곡이다.

지금은 식어버렸다 해도 한 때 나를 고통스럽게 할 만큼 뜨거웠던 사랑을 경험했다면, 나를 억누르는 고통과 인내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예술공간 오이의 <갈매기>는 당신을 위로해줄 연극이 되겠다.

<갈매기>는 11월29일까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공연한다. 시간은 오후 3시와 7시다. 관람료는 현장 구매 1만3000원, 예매 1만2000원, 재관람 8000원이다. 15세 이상 관람가.

예술공간 오이
제주시 연북로 66 지하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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