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60) 하여튼 그런 저녁/ 이숙경

맨발로 걷는 길. ⓒ김연미

실반지를 꺼내 놓고 손과 발 문득 보네
하나는 드러내고 하나는 늘 감추는
한몸에 나고 자라도 그늘진 이끼의 발

짧고 무딘 발가락을 손가락에 대보네
모두 다 길었다면 먼저 잡으려 다투고
밑에서 받쳐주는 일 서로 미뤄 놓쳤겠지

사는 가락 달라서 헛뿌리로 견뎌온 길
치켜세워 힘을 주는 뚜벅이 발끝에서
미더운 하나를 골라 발가락찌 끼워 주네

- 이숙경, <아무튼 그런 저녁> 전문

뒤에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반짝 반짝 빛나던 시기를 건너왔거나, 아직 그 빛나는 시기조차 가져보지 못한 것들, 어디 가서 목소리 한 번 크게 내보지도 못하고, 묵묵히 눈만 껌벅거리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찬사는 앞에 있는 것들에게 양보하고, 저 혼자 어렵고 힘든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해 온 것들이다. 시대가 어려워질수록 먼저 더 어려워지고, 시대가 하향곡선을 내릴 때마다 먼저 심연의 골짜기로 직선을 내리꽂는다. 

롤러코스터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코로나 시대. 어느 것이 정의이고, 어느 것이 삶의 길인지조차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는 재난문자를 보면서도 묵묵히 제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더 먼저 어려워지고, 더 먼저 마음이 무거워지겠지만 한시도 제 일에서 손을 떼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다. 가끔 전쟁 같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올 때, 왜 아니 그립겠는가.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 누군가의 따뜻한 눈빛. 

‘하여튼 그런 저녁’. 시인은 실반지를 꺼내놓고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아니라 짧고 뭉툭한 발가락에 끼워보는 것이다. 무거운 몸을 온전히 다 지탱하면서도 언제나 맨 아래에 있고, 냄새나는 신발 속에 갇혀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 발의 마음. 그 헛헛한 마음에 따뜻한 온기 한 점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 바닥의 힘겨움을 알고 있다고, 토닥토닥 위로해 주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시인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이며, 이 땅의 모든, 뒤에 있는 것들에게 보내는 위로인 것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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