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법정의기록] (9)생존수형인 고태삼-이재훈 할아버지 재심...종달리 6.6사건-물고문 생생한 증언

제주4.3 당시 10대의 나이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생존수형인 이재훈(왼쪽) 할아버지와 고태삼(오른쪽) 할아버지. 3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첫 재심 청구사건 심문 절차를 끝내고 법원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제주4.3 당시 10대의 나이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생존수형인 이재훈(왼쪽) 할아버지와 고태삼(오른쪽) 할아버지. 3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첫 재심 청구사건 심문 절차를 끝내고 법원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제주4.3의 참혹한 역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10대 청소년도 예외는 없었다. 폭행에 물고문까지 버티며 90대 할아버지가 된 이들은 국가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30일 오전 10시 소요와 내란실행방조 등의 혐의로 옥살이를 한 고태삼(92), 이재훈(91) 할아버지를 상대로 첫 심문 절차를 진행했다.

백발의 노인이 된 이들은 법정에서 70여년 전 기억을 생생히 떠올렸다. 재심청구인 자격으로 피고인석에 앉았지만 당당하게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출신인 고 할아버지는 종달리 6.6사건의 당사자다. 6.6사건은 1947년 6월6일 민청단원들과 경찰관이 충돌해 경찰이 집단 구타당한 사건이다.

고 할아버지는 당시 민청으로 불리는 조선민주청년동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룬 산 증인이다. 당시 6.6사건으로 종달리 청년 44명이 무더기로 일반재판에 넘겨졌다.

6.6사건 이후 마을을 떠났지만 1947년 6월16일 경찰에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갔다. 기다리는 건 폭행과 고문이었다. 정신을 잃을 만큼 맞고 눈을 뜨면 폭행은 또 이어졌다.

제주4.3 당시 10대의 나이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생존수형인 이재훈(왼쪽) 할아버지와 고태삼(오른쪽) 할아버지. 3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첫 재심 청구사건 심문 절차를 끝내고 소감을 밝히고 있다.
제주4.3 당시 10대의 나이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생존수형인 이재훈(왼쪽) 할아버지와 고태삼(오른쪽) 할아버지. 3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첫 재심 청구사건 심문 절차를 끝내고 소감을 밝히고 있다.

그해 7월31일 제주지방심리원(현 제주지방법원)에서 포고 제2호 및 법령 제19호 위반 혐의로 단기 1년 장기 2년을 선고 받았다. 당시 나이는 18세 청년이었다.

1년간 복역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성인이 돼서도 아들은 원양어선 승선을 거부당하고 딸은 교사 발령이 늦춰지는 등 연좌제로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고 할아버지는 “지난 70년이 너무나 억울하다. 학교도 못가고 직장생활도 못하고 농사 일만 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어렵게 학교에 보냈는데, (국가가)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다”며 한탄했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출신인 이재훈 할아버지는 제주중학교 재학중이던 1947년 8월13일 북촌마을에서 경찰에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1947년 8월14일 경찰서에 끌려갔다. 

일명 삐라(전단)를 단속하던 경찰의 총격으로 총상을 입은 마을 주민의 억울함을 항의하기 위해 이웃들과 함덕지서를 찾아왔다는 이유에서다.

함덕지서에 들어서자 두 발을 묶고 폭행이 이어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물고문을 당했다. 포승줄에 이끌려 제대로 된 기소나 재판 절차도 없이 단기 1년에 장기 2년을 선고 받았다.

수형생활 1년 6개월 만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마을은 불에 타고 가정은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어머니는 함덕에서 총살되고 아버지는 경찰에 끌려 간 후 행방불명인이 됐다.

제주4.3 당시 10대의 나이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생존수형인 이재훈(왼쪽) 할아버지. 이 할아버지는 4.3으로 부모님과 누나를 잃고 당시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며 어려운 생활을 해 왔다.
제주4.3 당시 10대의 나이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생존수형인 이재훈(왼쪽) 할아버지. 이 할아버지는 4.3으로 부모님과 누나를 잃고 당시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며 어려운 생활을 해 왔다.

7남매 중 둘째 누나도 총살을 당해 고인이 됐다. 장남이던 이 할아버지와 살아남은 5남매는 부산에 있던 조부모의 도움을 받아 겨우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경찰서에서 몇 시간을 두드려 맞는지도 몰랐다. 일어서질 못해서 15m를 기어다닌 기억이 있다. 실컷 때리고 밤에도 또 끌고 가 물고문을 했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이어 “고문을 견디다 못해 벽에 붙여진 삐라를 읽었다고 했다. 그 후에는 곧바로 형무소로 끌고 갔다. 그렇게 사람을 패고 수감까지 시키다니. 억울함이 짝이 없다”며 재판부를 응시했다.

이 할아버지는 “학교를 제대로 마쳤다면 떳떳한 사회구성원이 됐을 텐데. 국가가 원망스럽다. 이런 무법천지가 대체 어디 있느냐.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또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들은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의 도움을 받아 4월2일 법원에 재심청구를 했다. 생존수형인에 대한 재심 청구는 이번이 세 번째다.

제1차 18명에 대해서는 2019년 1월17일 역사적인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제2차 8명은 16일 검찰이 무죄를 구형하면 사상 첫 무죄 판결을 앞두고 있다.

재판부는 제3차 청구인인 이들에 대해서도 심문 절차를 마치고 조만간 개시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재심 개시가 이뤄지면 유무죄를 가리기 위한 정식 공판 절차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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