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행불수형인 첫 재심 개시 결정을 보며

영화 <재심>을 보고나면 가슴이 먹먹한 것은, ‘어쩌면’ 누명을 벗겨줄 재심 때문이 아니다. 고문과 조작으로 목격자를 살인범으로 몰고간 경찰, 진실을 밝히기 위한 두 남자의 눈물겨운 사투 때문도 아니다. 열다섯살 소년 현우(강하늘 분)의 ‘잃어버린 10년’은 어쩔 것이냐는 생각에서다. 그 느낌이 너무 부담스러워 채널을 돌릴 때도 있다.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게 있다. 시간이다.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그 시간이 앞날이 창창한 10대의 것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현실에서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피살사건’은, 2000년 당시 누명을 썼던 15세 소년은 재심 끝에 무죄(2016년 11월17일), 진범은 징역 15년형 확정(2018년 3월27일)으로 마무리되었다. 소년의 무죄는 살인범이 된 후 16년만의 일이다. 

법원은 죄를 뒤집어썼던 소년에게 형사보상금 8억4000만원 지급을 결정했지만, 소년은 벤자민 버튼이 아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살인자로 손가락질 받았을 가족들의 고통 역시 누가 헤아려주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권선징악도 없었다. 사건 3년 후 진범이 잡혔는데도, 검찰은 사건을 덮는 것도 모자라 끝까지 진실 규명을 방해했다. 2015년 6월22일 재심 결정이 나자 검찰은 대법원 항고로 맞섰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약촌의 소년’처럼 이 세상에 억울한 사연이 어디 한 둘 뿐이랴마는, 제주에는 무려 70년 넘도록 누명을 벗지 못한 도민들이 많다. 바로 4.3수형인들이다. 

영화 '재심' 포스터=오퍼스픽쳐스. ⓒ제주의소리
4.3행불수형인에 대한 사상 첫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지자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족, 4.3평화공원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는 유족, 영화 '재심' 포스터=오퍼스픽쳐스(왼쪽부터). <그래픽=김찬우 기자>

광풍에 휘말린 이들은 영문도 모른채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끌려갔다. 내란 실행, 국방경비법 위반 등등의 혐의가 덧씌워졌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이 뭔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모르는게 당연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극의 땅’ 제주에 있었다는게 죄라면 죄였다. 약촌의 소년처럼 말이다. 당시 군 지휘관의 인식에서 보듯 상당수 도민이 빨갱이로 몰렸다. 

온갖 고문이 자행했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없는 죄를 털어놓아야 했다.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판결문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뒤늦게 드러났지만, 당시 군법회의 자체가 불법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이들은 운이 좋았다. 투옥된 뒤 행방도 모른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생존자들은 낙인이 찍혔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유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반세기 넘게 숨죽여 살아야 했다. 4.3특별법이 제정된 게 1999년이다.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던지 70여년 전의 일을 입 밖에 내는 것 조차 몹시 두려워했다. 

4.3 당시 두 살배기였던 김춘보(74) 할아버지에게서 트라우마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4.3행불수형인 재심을 청구한 김 할아버지는 최근 집 밖으로 나오면서 96세 노모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 재심 청구 사건에 대한 심문이 잡힌 날이었다.

두 살 소년의 가족은 1948년 군경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 전체가 불에 타면서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군경을 피해 산으로 향한게 고난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봄,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말에 하산했으나 이미 집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약속과 달리 온 가족이 주정공장으로 끌려갔다. 그 중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다시 목포형무소에 수감됐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노모가 말문을 닫은 것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다. 김 할아버지는 더 이상 노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만을 기원했다.  

세상이 변하긴 변했다. 4.3행불수형인들에게도 전과자라는 낙인을 지울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달 30일, 사상 첫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그동안 4.3생존수형인들은 재심을 통해 사실상 무죄를 뜻하는 공소기각 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행불수형인들은 재심 결정 자체가 처음이다. 

재판부(제주지법 제2형사부, 장찬수 부장판사)의 판결 내용이 눈에 띈다. 70여년 전 판결문은 없지만, 재심 청구 사유가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불법 구금과 고문을 재심 사유의 하나로 들었다. 행불수형인들이 처우가 좋지못한 수감자 신분에서 한국전쟁까지 발발해 생존을 보장받기 어려웠던 점도 참작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만약 생존했다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보인다”고 했다. 

판결을 환영한다. 이게 정상이다.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에게 무덤에서 나와 자초지종을 설명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족들이 온전히 그 책임을 떠안도록 하는 것도 가혹하다. 그나마 1998년 발굴된 군법회의 수형인명부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검찰도 약촌 사건의 검찰과는 달랐다. 생존수형인 재심에서 재판부에 공소기각을 요청하더니 11월16일에는 사상 첫 무죄를 구형했다. 둘 다 무죄 취지인 것은 같으나, 무죄 구형이 공소기각 요청 보다는 전향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무죄 구형 당시 공판검사는 “피고인들의 체험을 전해듣고 문헌을 검토하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4.3의 역사적 의미와 도민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많이 배우고 느꼈다”며 희생자의 규모 등을 언급해 주위를 숙연케했다. 

4.3의 완전한 해결로 나아가는 지름길은 4.3특별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이겠으나, 그 길에 놓인 재심 또한 중요하다. 좋은 결과가 신속히 나오길 기대한다. 

아직도 4.3행불수형인 300여명이 대기하고 있다. 약촌 소년과 달리 이들은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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