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00. 농사도 낯 바꾸면서 해야 한다

* 용시 : 농사(農事)
* 놋 바꾸멍 : 낯 바꾸면서
* 해사 혼다 : 해야 한다

지금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지만, 한때 열 평 남짓한 텃밭에 열성을 다했던 적이 있었다. 소년 시절 검질(김)은 매 보았지만 커서 농촌을 떠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 이상 농사짓는 일에 종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농촌에서 자라면서 보고 들은 게 농사일이라 어깨 넘어 공부는 어느 정도 있었다. 다소간 간접적이나마 축적된 학습량은 무시못한다. 또 중학생 때 실업 선택과목이 농업이었다.

고추, 쪽파, 부추, 상추, 가지, 방울토마토, 배추, 무 등. 텃밭에 모종을 심어 가꾸기를 연년이 했다. 정년퇴임 후의 무료함을 달래는 데 소규모의 텃밭 재배는 여가 선용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영역이다. 손이나 발로 흙을 만지고 밟으면 몸의 소소한 결함은 접지치유(接地治癒)된다는 것이 삼림 치유사들이 내놓는 일관된 견해이기도 하다.

한 서너 해 시도했더니,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이 불거져 나오는 게 아닌가. 연작(連作)은 작황이 시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수확도 매우 좋지 않았다. 특히 고추를 심었던 자리에 고추를 연달아 재배하면 효능이 크게 떨어졌다. 쪽파를 심었던 그루에 심은 쪽파는 퍼렇게 자라다 잎 끝에서부터 누렇게 시들 맞으면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아, 그냥 파내 버리고 말았다.

아무 흙에서나 잘 되는 것이 상추와 부추였다. 상추는 물만 잘 주면 시퍼렇게 돋아나고 병충해도 없다. 좀 과장해서 이틀에 한 번씩 뜯어 식탁에 올릴 만큼 잘 자라는 채소다. 부추(정구지, 솔)는 방언으로 ‘새우리’다. 어릴 때, 옛집 우영팟 처마 밑을 따라 뼘 반폭으로 가지런히 자라던 부추밭이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물을 안 주어도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머금고 무성했다. 칼이나 호미(낫)로 베어 무쳐 먹거나 반찬에 양념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참 요긴했다. 베어도, 베어도 다시 돋아나던 채소다.

‘바꾸명(심었던 자리를 바꾸면서)’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냥 싱싱하게 자랐으니, 텃밭농사 초년생에게 이런 은혜로운 푸성귀는 없다. 

출처=서재철, 제주학아카이브.
우리 선인들, 특히 농민들의 경험칙(則)은 대단했다. 몸으로 겪으면서 얻은 산지식이니 다른 이론과는 대별될 수밖에. 사진은 1980년대 제주 수박 농사. 출처=서재철, 제주학아카이브.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 하나. 어머니는 여름철이면 우영에 구덩이 두셋을 파서 퇴비로 밑거름을 해 가며 수박을 심었다. 어느 해던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고, 이거 보라게. 작년 심었던 그루에 또 심었더니 수박이 잘 안된 거….” 수박이 열리긴 했는데, 쪼개 보니 벌겋게 육즙이 그득 차야 할 것인데, 말라 빠졌잖은가. 육즙이 채워져 있어도 무언가 이상했다. ‘피수박’이 돼 버렸다고 했다. 단맛이 없어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 선인들, 특히 농민들의 경험칙(則)은 대단했다. 몸으로 겪으면서 얻은 산지식이니 다른 이론과는 대별될 수밖에.

‘용시도 놋 바꾸멍 해사 혼다.’ 기막힌 말이다. 

말 그대로 얼굴을 바꿔가면서 농사도 해야 한다. 즉, 가급적 작물을 해마다 바꿔가며 재배하는 게 좋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놋 바꾸멍 호지 못할 때’ 우리 선인들은 마당가에 쌓아 올렸던 두엄(퇴비)을 밑거름으로 뿌린 연후에 쟁기로 밭을 갈아엎었다. 토질의 황폐, 산성화를 최소화하면서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옛날 얘기다. 지금 퇴비라는 짚이나 풀을 썩힌 거름은 찾아볼 수 없다. 화학비료를 뿌리고 농약을 치며 농사를 한다. 밭이 박토가 되고 있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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