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61) 빈문서 / 서연정

빈 하늘. ⓒ김연미
빈 하늘. ⓒ김연미

그 해의 첫눈이 내리고 난 이후엔
함박눈 쏟아져도 눈은 그냥 눈이듯

빈은 첫, 
복사되지 않은
오직 하나의 표정

겨울 달 눈빛 같은 차고 맑은 눈물 맛
염색한 말의 가죽 덧대면 흔해 빠진다
공들인 시의 집에서도 금세 낡고 닳는 말

마스크 쓰고 있어 읽을 수 없는 마스크
견고한 틀 하나로 뭉뚱그리기 전에

원본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
파일명은 빈문서

-서연정, <빈문서> 전문-

숨고 싶어질 때가 있다. 밖으로 열려 있는 모든 창문을 닫고 방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내가 세상의 한 가운데 서 있어야 할 때다. 좀 더 깊숙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그들과 나의 감정을 공유하고, 어쩌면 우리는 원래부터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싶어질 때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강렬할수록 그 강렬함 뒤편에 혼자만의 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의 상처. 빈 도화지 위에 하나씩 그어지는 그림이다. 상처임을 알면서도 우린 멋진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을 놓지 못한다. 유행하는 색깔을 고르고, 색깔에 색깔을 덧칠한다. 의도한 대로 그려지지 않는 실력을 탓하며 그게 나인 양, 다른 사람들이 그린 그림 옆에서 눈높이를 맞추려 한다. 그러나 정작 나의 원본은 빈 도화지 그 자체인 것을...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원본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고 아무도 손 못 대게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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