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법정의기록] (10)행방불명인 40명 재심청구...고 강윤식 씨 딸 강방자 할머니 진술에 법정 숙연

재심청구에 따른 심문에 참석하기 위해 12월14일 제주지방법원을 찾은 강방자(78) 할머니.
재심청구에 따른 심문에 참석하기 위해 12월14일 제주지방법원을 찾은 강방자(78) 할머니.

여든을 바라보고 있지만 71년 전 기억은 생생했다. 목이 잘려 나간 큰어머니와 새어머니 시신 품에서 젖을 빨던 동생 이야기가 전해지자, 법정은 쏟아지는 탄식과 함께 숙연해졌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국방경비법 위반과 내란실행 등의 혐의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사라진 행방불명인 40명의 재심청구 사건에 대한 심문절차를 14일 진행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고인이 된 아버지 강윤식씨를 대신해 재심청구인 자격으로 법정에 선 강방자(78) 할머니는 거침이 없었다.

강 할머니는 1948년 4.3당시 6살이었다.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 속칭 굽은다리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어버지와 지냈다. 어머니는 4.3사건이 터지기 3년 전인 1945년에 생을 마감했다. 

대가 끊길 것을 우려해 집안 어른들이 새어머니를 집으로 들였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생후 8개월 된 이복동생이 생겼다.

이후 아버지는 함덕에 새어머니와 함께 지낼 집을 마련하고 두 집을 오갔다.

4.3이 발발하면서 조용하던 마을에 군경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1948년 추석 즈음 대문 밖에서 군화 발소리가 퍼졌다. 가족들은 곧바로 고팡으로 몸을 숨겼다.

식구들은 초토화작전을 피해 산으로 몸을 숨겼다. 마을 전체가 불에 탈 것이라는 소식에 동굴을 오가며 생활했다. 곧이어 해변으로 몸을 피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당시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힘든 형의 집에서 곁을 지켰다. 마을 전체가 불에 탔지만 웬일인지 그 집만은 멀쩡했다. 다행인줄 알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아버지가 함덕국민학교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할머니 손을 잡고 면회를 갔지만 이틀 만에 아버지는 함덕지서를 거쳐 주정공장으로 다시 끌려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몇달 후에 마포형무소에서 아버지 편지가 왔어. 큰아버지에게 나를 돌봐달라고 썼어. 새해에 8살이 되니까 학교에 보내달라고. 그 일만 없었으면 나도 학교도 다니며 잘 살았을 텐데...”

끝난 줄 알았던 4.3의 광풍은 해는 넘겼다. 1949년 가을 군경이 들이 닥쳤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사촌형제가 줄줄이 빨갱이로 내몰려 조천지서로 끌려갔다.

나이가 많다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돌려보냈다. 강 할머니도 어린 사촌형제들도 함께 풀려났지만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식들의 악몽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군경은 큰아버지 내외를 산으로 끌고 가 사살했다. 할아버지는 시신을 찾기 위해 집단 총살이 이뤄진 동굴로 내달렸다. 시신더미를 해치며 동굴 맨 안쪽에서 큰아버지 내외를 발견했다.

강요배의 작품 '젖먹이', 캔버스에 아크릴릭, 160x130cm, 2007. / 사진=제주4.3미술제 홈페이지.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요배의 작품 '젖먹이', 캔버스에 아크릴릭, 160x130cm, 2007. / 사진=제주4.3미술제 홈페이지.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당시 큰어머니는 목이 잘려나간 모습이었다. 키가 작았던 큰어머니의 저고리를 보고 단숨에 할아버지는 며느리의 모습을 알아봤다. 동굴 주변 산 전체를 뒤졌지만 머리를 찾지 못했다.

가족들 무리에서 떨어져 피난 생활을 했던 새어머니도 4.3의 현실을 피하지 못했다. 갓난아이를 가슴에 품고 산속으로 들어갔지만 머리에 총을 맞고 젊은 생을 마감했다.

살아남은 이복동생은 송장이 된 엄마 가슴팍에 묻혀 젖을 빨다가 어딘지도 모를 산 속에서 객사했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할아버지는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전부 죽었어. 아버지, 큰아버지, 남동생까지. 대가 끊기고 집안은 쑥대밭이 됐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남은 손녀 4명을 키운 거야. 제사를 지내야 하니 결국 6촌 형제를 양자로 들였어” 

머리가 잘려나간 시신에 사촌 자매들은 지금껏 4.3 이야기만 나와도 트라우마에 말을 잇지 못한다. 시신은 3차례 이장 끝에 양자가 묘소를 개장해 납골당에 모셨다.

총살 당한 새어머니와 이복동생은 친정에서 시신을 수습해 제를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 농사짓던 사람들인데. 대체 뭘 잘못했길래 총을 쏴 죽이고 옥살이까지 시키느냐 말이지. 저승에서 부모님을 만나면 이 더러운 불명예를 깨끗이 씻고 왔다고 해야할 것 아니야. 나도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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