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15) 제주 중공군 포로수용소 그날의 기억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포로수용소 건물이 나지막하고 검은 루핑 지붕이라서 여름철에는 실내 열기가 대단해 나무판자로 물방아같이 선풍기를 만들어 포로병들이 줄을 매 교대로 당기며 바람을 만들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미군부대 출입 이발사 서병수 씨 모슬포 중공군포로수용소 목격담 내용. 『대정읍지 1』 中)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부는 친공-반공포로 간 분산수용 정책을 펼쳐 모슬포 지역에 유엔군 포로수용소 캠프-3을 설치하고 약 2만여 명의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포로를 제주도로 내려보냈다. 

포로로 붙잡힌 중공군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친공포로와 중화민국(대만) 반공포로로 나뉘어 포로 수용 기간 수용소 안에서 소란과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 경남 거제포로수용소에선 노동당 정치부장을 비롯한 친공포로들이 포로관리 사령관 ‘돗드’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제주도로 보내진 중공군 포로는 친공계는 지금의 제주국제공항 화물청사 인근 제주시 용담동 다끄네 마을 ‘용담분소’, 반공계는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본소’로 분산 수용됐다.

제주시수용소 구역 및 정뜨르비행장. 출처=육군본부, 논문 '포로수용소의 설치 및 해제와 주민들의 고통-제주·통영을 중심으로'. ⓒ제주의소리
제주시수용소 구역 및 정뜨르비행장. 출처=육군본부, 논문 '포로수용소의 설치 및 해제와 주민들의 고통-제주·통영을 중심으로'. ⓒ제주의소리
한국전쟁 당시 제주 모슬포 중공군 포로수용소 위치. 중공군 포로 가운데 반공포로들은 모슬포 본소와 염수굴 분소, 멜캐 분소에 분산 수용됐다. 현재 본소와 염수굴 분소는 흔적이 사라진 상태며, 멜케 분소에 일부 담장만이 포로수용소였음을 나타낸다. 지도=카카오맵. ⓒ제주의소리
한국전쟁 당시 제주 모슬포 중공군 포로수용소 위치. 중공군 포로 가운데 반공포로들은 모슬포 본소와 염수굴 분소, 멜캐 분소에 분산 수용됐다. 현재 본소와 염수굴(염소굴) 분소는 흔적이 사라진 상태며, 멜케 분소에 일부 담장만이 포로수용소였음을 나타낸다. 지도=카카오맵. ⓒ제주의소리

당시 대정읍 상모리 산이수동 주민들과 제주시 용담동 다끄네마을 주민들은 중공군 포로수용소 건립을 이유로 토지가 징발당하거나 강제 이주명령을 받아 삶의 터전을 잃기도 했다. 

수용소별 나눠진 중공군 포로는 제주시 친공포로 약 5800명, 모슬포 반공포로 약 1만4300명이었다. 제주 비행장 인근 용담분소에 수용된 친공포로들은 중공정부수립 3주년을 맞아 1952년 시위를 벌여 진압 과정서 50여 명이 넘는 포로가 사살되기도 했다.

모슬포 지역으로 온 반공포로들은 인원이 많은 탓에 집단을 형성할 수 없도록 본소와 ‘멜캐’, ‘염수굴(염소굴)’ 총 2개의 분소에 나눠 수용됐다.

대정읍지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대정읍지에 따르면 현 대정읍 상모리 68번지 ‘절완지물’ 주변 속칭 만다리 일대 약 16만5200㎡(5만여 평)의 땅이 본소였다. 당시 순찰감시도로로 사용된 길은 현재도 형태를 유지한 채 농로로 사용 중이기도 하다.

멜캐 분소는 현 대정읍 하모리 뒤통물 동편 105번지 인근 ‘중공군 포로수용소 유적 담장’이 남아있는 곳을 중심으로 약 9만2500㎡(2만8000여 평) 규모였다. 염수굴(염소굴) 분소는 현 셋알오름 일제고사포진지 일대에 있었다.

멜캐는 ‘멜(멸치의 제주어)’이 잘 잡혔던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개)이라는 뜻으로, 한자 표기로 행어포(行魚浦), 한자 차용 표기로 약포(鰯浦) 등으로 표기됐다. 개 가까이 형성된 동네는 ‘멜캣동네’ 였으며, 한자 차용 표기에 따라 ‘약포동(鰯浦洞)’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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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포 중공군 포로수용소 사진. 출처=21수송편대(21st Troop Carrier Squadron) 미군사진. 제공=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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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포로수용소 오른쪽 뒤로 현재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형제섬이 보인다. 형제섬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해당 포로수용소는 '모슬포 본소' 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21수송편대(21st Troop Carrier Squadron) 미군사진. 제공=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제주의소리

취재 기자와 함께 현장을 둘러본 김웅철 대정현역사문예포럼 이사장은 “본소는 군용도로를 이용해 수송하기 좋고 넓어 많은 중공군 포로를 수용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 따라 많은 사유지가 징발돼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본소가 사람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멜캐 분소였다. 이곳에서는 포로들이 채소밭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장대가 설치 운영되기도 했다”면서 “염수굴(염소굴) 분소는 셋알오름 일제고사포진지 인근으로 포로가 많진 않았다. 반공계 중공군 포로들이 송악산 등성이를 배경으로 찍힌 사진도 많이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김웅철 이사장은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당시 둘째 형이 중공군을 많이 봤다며 늘 ‘떼놈’이라고 부르고 다녔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포로로 잡혀온 중공군들이 재주가 많아 양철 조각을 모아 나발과 북을 만들고 아침마다 사열하는 등 비교적 분방한 생활을 이어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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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포 작전구역을 나타내는 팻말에는 중공군 포로수용소를 나타내는 '유엔군 포로수용소 캠프3(UNPW CAMP`3)' 표식이 적혀있다. 출처=21수송편대(21st Troop Carrier Squadron) 미군사진. 제공=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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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에 있는 중공군 포로수용소 유적 담장. ⓒ제주의소리

모슬포에 수용된 반공포로들은 모슬포성당 ‘통회의 집’(현 사랑의 집) 건물 신축에 투입되기도 했다. 포로수용소 설리반(sullivan) 군종신부는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터를 닦고 건물을 짓도록 해 석조와 외벽공사를 마쳤다.

이어 김이환 육군 제1훈련소 군종신부와 김덕제 신부가 성당을 완공해 ‘한국에 많은 피해를 입힌 죄를 뉘우치며 지은 집’이라는 뜻의 ‘통회의 집’으로 불리다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하자는 고병수(요한) 신부의 뜻에 따라 1996년 이름을 바꿔 지금의 ‘사랑의 집’이 됐다.

고병수 신부는 [제주의소리]와의 통화에서 “당시 '통회의 집'은 중공군 포로들이 전쟁에 대한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을 하나씩 얹어가며 지은 집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을 떠나 종교적 화해 차원서 사랑하고 포용하며 기도하자는 생각으로 '사랑의 집'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이게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양신하 대정읍지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제주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군종신부였던 설리반 신부가 전쟁 잘못을 뉘우치며 일하라는 교화의 의미를 담아 중공군에게 지시한 것이 출발”이라며 “만다리 주변 돌을 깨 만든 것이 현재 모슬포성당 옆 사랑의 집이다”라고 설명했다. 

양 위원장은 모슬포 포로수용소에 대해 “당시 알뜨르 인근은 ‘바람코지(바람받이)’였다. 바람이 많이 부는 탓에 건물을 높게 지을 수 없으니 얕았고, 지붕을 루핑으로 만들어 더위와 추위에 취약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포로수용소는 미군들이 감시를 담당했는데, 미군부대 출입 이발사였던 서병수 씨와의 대담에서 서 씨는 ‘건물이 열을 받아 무더워져 중공군 포로들이 땀을 흘려 머리가 뭉쳐버리니 수동식 바리깡이 먹통이 되기 일쑤였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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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공사가 이뤄진 사랑의 집(사진 왼쪽)과 예전 사랑의 집 모습. ⓒ제주의소리
양신하 대정읍지편찬위원회 위원장. ⓒ제주의소리
양신하 대정읍지편찬위원회 위원장. ⓒ제주의소리

양 위원장은 “당시 19살이던 우리 형님도 1950년 입대 이후 소식이 끊겼다가 53년 만에 전사통보를 받기도 했다”면서 “현충원 지하에 작게 써진 형님 이름을 보고 대성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나라가 경제 10대국으로 잘살게 된 것도 나라를 위해 혼을 불태운 분들 덕”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주에 남겨진 한국전쟁 흔적들을 통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억할 수 있다. 이분들 덕분에 평화를 얻게 된 것”이라며 “사라진 역사가 아닌 지금도 이어지는 역사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잘 지켜 평화를 위한 그들의 구국 노력을 느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중공군 포로수용소는 멜캐 분소의 아주 일부 담장 유적만 남아있을 뿐, 본소와 염수굴, 용담 분소는 작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다.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유적을 지금이라도 잘 보호해 앞으로 항구적 평화를 이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따른다.

1950년 6월 25일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돼 1953년 7월 27일 열강의 패권 다툼 속에 한겨레가 둘로 쪼개져 버린 가슴 아픈 전쟁은 제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포화가 빗발치는 전장의 중심은 아니었으나 병력 양성, 물자 조달, 포로 수용 등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

제주 땅에 남겨진 한국전쟁 흔적은 평화적 메시지를 담은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사라져가고 있는 흔적을 잘 보존하고 미래 세대에게 전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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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로 만든 나발을 손에 쥐고 드럼을 허리에 맨 채 사열하는 반공포로. 미국의 성조기와 대만의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를 함께 들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21수송편대(21st Troop Carrier Squadron) 미군사진. 제공=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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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에서 촬영한 미군과 앳된 모습의 중공군 포로 사진. 출처=21수송편대(21st Troop Carrier Squadron) 미군사진. 제공=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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