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희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봄날이 어랑어랑 오기는 하나요’(걷는사람)를 펴냈다.

시인은 4부 60편의 작품 속에 “나로부터 시작된 고통이 당신과 우리, 종국에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공감과 증언”을 꾹꾹 눌러 적었다.

쓸쓸한 가을 바람에 느끼는 사랑의 여운,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에 빗댄 감정의 오묘한 변화, “숨비소리 한 대목이 사라지는 날이면 바다도 몸이 무너진 채 운다”고 풀어낸 제주해녀의 숙명,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국가 폭력이란 공통분모를 지닌 제주4.3, 베트남전쟁 등…. 시인은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처럼 내면과 주위를 돌아본다. 담담하기에 여운은 더 짙게 남는다. 

아무도 안녕이라
말 못 하는 사월 숲속

허물어진 비트 안에 짐승처럼 웅크려서
무쇠솥에 콧구멍을 들이밀던
밥내의 기억

오래전 녹슨 허기로
엉겨 붙은 발치쯤

흩어진 봄빛 아래 밑불 놓듯 촛불 켜고
이슬 먹은 풀잎으로 쇠솥을 닦고 닦아

싸락눈
싸락 싸그락
됫박쌀을 씻는가

가슴에 숟가락 하나 꽂고 간 그 사람도
먼 길 휘적휘적 절절히 돌아와서
여린 꿈
밀어 올렸나,
제비꽃이 피었다

- ‘사월에 내리는 눈’ 일부분

현기영 소설가는 추천사에서 “시인은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응시한다. 몸속에 어둠이 똬리를 틀고 있고, 날카로운 갈등의 바늘엉겅퀴들이 솟아 있다”면서 “제주 특유의 거친 자연을 노래한 시편들, 내면 풍경의 묘사도 좋긴 하지만 내 마음을 더 끄는 것은 4.3의 슬픔에 대한 시편들이다. 4.3의 망자들을 위한 진혼의 목소리가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고 호평했다.

저자는 책 소개에서 “문장들은 덜그럭거리고, 어긋난 행간은 쉬 바로잡히지 않는다. 말을 줄이는 방식이 어렵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을 좁히고 싶은 내 사사로운 몸짓에 詩(시)는 응답해 줄까. 그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달빛을 켜 두는 겨울밤”이라고 감성적인 소감을 남겼다.

홍경희 시인.

이번 책은 첫 번째 시집 이후 10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그는 현기영 소설가가 언급한대로 “궂은일도 마다않은 성실한 살림꾼”으로 제주작가회의와 제주문학의 집 사무를 담당했다. 한때는 시집보다 사업계획서, 정산서를 가까이 둘 만큼 바쁘게 지냈지만, 이번 시집 '봄날이 어랑어랑 오기는 하나요'는 시인으로서 홍경희를 만나는 반가운 경험이다.

홍경희는 제주도 귀덕에서 태어났다. 2003년 ‘제주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그리움의 원근법’을 냈다.

144쪽, 걷는사람, 1만원.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