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62) 여백/ 김삼환

하늘에 그은 구름의 밑줄. ⓒ김연미
하늘에 그은 구름의 밑줄. ⓒ김연미

붓이 닿지 않는 곳도 그 의미를 살려내듯
진한 눈물 없어도 한 슬픔이 젖어서
말 없는 소멸의 길에 빗방울이 스몄다

흔적을 찾고 보면 그 안의 모든 것이
한 생을 말하다가 문득 멈춰 서 있는데
배경은 보이지 않고 바람 또한 스쳐갔다

때로는 주인으로 어떤 때는 손님으로 
홍제천변 빈자리를 살펴보던 백로처럼
씻은 듯 맑은 하늘에 빗금 하나 그어 놓고

-김삼환 <여백> 전문-

2020년을 마무리하려 한다. 코로나 19가 온 지구를 덮쳐 버린 해. 그 한 해가 가고 있다. 피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2020년 365일을 무사히 살아낸 사람들에게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다. 처음 맞닥뜨린 바이러스의 공포 앞에서 망연자실했던 심정을 추슬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암시민 살아진다’ 72년 전의 언어를 되새기며 기어이 살아낸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 싸움은 당장 끝나지 않을 듯하고, 새해의 담을 어물쩍 넘을 듯 한데...

여백을 무시하고 살았던 것에 대한 대가가 이렇게 혹독할 수 있다는 걸, 예전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붓이 닿지 않는 곳’에 대한 의미를 모르고 붓끝만을 쫒아 왔던 근시안에 대해 얼마나 더 후회를 해야 할까. 정상에 닿기 위해 무시되었던 그 많은 것들의 의미를 우리는 왜 진작에 알아채지 못했을까. 새삼, 위기의 시간을 건너며 건져 올린 깨달음의 한 조각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계단 하나를 무사히 올라설 수 있을 것인가... 의심해 보는 시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카레니나에 나오는 레빈처럼, 오랜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고 나서도, 별반 달라질 것 없는 평상의 행동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우리는 실망을 감추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 여백이 있고, 그 여백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이상, 우리는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때로는 주인으로 어떤 때는 손님으로’ 가끔 씩은 우리 인생에 불쑥 끼어들어 굵은 ‘빗금’ 하나 그어놓고 가는 여백의 의미를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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