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16) 귤 / 김진경 베지근연구소장 제주음식연구가

밥이 보약이라 했습니다. 바람이 빚어낸 양식들로 일상의 밥상을 채워온 제주의 음식은 그야말로 보약들입니다. 제주 선인들은 화산섬 뜬 땅에서, 거친 바당에서 자연이 키워 낸 곡물과 해산물을 백록이 놀던 한라산과 설문대할망이 내린 선물로 여겼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진경 님은 제주 향토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입니다. 격주로 '제주댁, 정지에書'를 통해 제주음식에 깃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글]

대한민국에서 ‘겨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과일이 있다면 십중팔구는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감귤즙이 팡팡 터지는 귤을 떠올릴 것이다. 한겨울 따뜻한 이불 속에서 만화책을 보며 귤을 까먹거나 가족들과 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바구니 속의 귤을 나눠 먹던 기억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경험일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이 귤을 사 먹지 않는 지역이 있다니. 게다가, 그 지역이 감귤의 본고장 제주라니. 얼마 전 온라인 행사를 위해 만난 서울의 요리연구가 선생님은 나의 이런 얘기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제주에서는 귤을 사 먹지 않는다고요?”

그렇다. 제주사람들은 귤을 사 먹지 않는다! 제주사람이라면 친척 중에 감귤 농사를 하지 않는 집이 없고 꼭 친척이 아니더라도 이웃이나 친구 중 감귤 농사를 하는 집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겨울철이 되면 품평회 하듯 궨당 콘테이너, 친구 콘테이너, 이웃집 콘테이너가 집으로 연일 들어온다. 그렇게 집으로 들어온 각각의 귤을 이불 뒤집어쓰고 손이 노랗게 되도록 하나씩 까먹는다. 해마다 겨울이면, 제주에서는 각각 다른 집에서 수확한 귤을 먹어보며 올해 귤 농사가 잘 되었는지 평가해 보는 재미있는 풍경도 펼쳐진다.

연경(燕京) 수도에서 예전에 한번 본적 있는데,
섬나라에 와서 다시 또 그 이름 알았네.
매번 다정한 이에게서 이 귤 받을 적마다
시 창자에 청량감 솟아남 두 배로 느꼈다네.

정헌(靜軒) 조정철(1751~1831)의 『정헌영해처감록(1811)』中 대귤(大橘)

27년간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조정철은 유배가 끝난 후 제주목사를 자처해 다시 제주에 와, 만 1년간을 지냈는데, 그 기간 동안 총 15종의 귤류(橘類)에 대해 정헌영해처감록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 품종 하나하나마다 칠언절구로 그 특징을 노래했다는 특징이 있는데 그 중 대귤을 노래한 시가 나에게는 참 와 닿는다. 민속원에서 2016년 발간한 『귤록-제주귤의 옛 기록(한언직 지음, 현행복 엮어옮김)』에 의하면 조정철 목사가 예전에 북경에 부임해 갔을 때, 황제가 닷새 동안 내려준 과일 중에 대귤이라는 과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에는 먹으면서도 그 이름을 알지 못했는데 탐라에 유배되어 와서야 비로소 그 과일이 대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귤은 매우 귀한 것이어서 아무도 그것을 주는 이가 없었고 오직 다정한 이가 특별히 대여섯 개를 해마다 나누어 보내준 것을 생각하며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대한민국에서 ‘겨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과일인 귤. 코로나19 사태로 새해가 와도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기만 하다. 이런 시기 온 가족이 함께 따뜻한 방안에 둘러앉아 이불 속 감춰둔 달콤한 귤을 까먹으면서 서로의 신년 소원을 나눠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보내보면 어떨까. 사진제공=부농농부. ⓒ제주의소리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2016년 민속원에서 발간한 '귤록-제주귤의 옛 기록'.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그 귀한 귤을 단 몇 개라도 주위사람과 함께 나누어 먹는 제주 사람들의 마음은 그 시대에도 여전했던 것 같다.

제주 사람들에게 귤은 나의 마음을 가족과, 이웃과 함께 나누는 매개체다. 물론 판매를 해도 되는 품질의 좋은 귤이 제주사람들의 집에 서로 오간다. 파는 것보다 우선 함께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은 이렇게 귤을 사 먹을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늦가을부터 겨울까지의 제주사람들의 안부 인사는 이렇다.

“집에 귤 이서? 귤 갖다 주카?”

아니, 어쩌면 이런 안부 인사도 없이 외출해서 집에 돌아와 보면 누군가가 놓고 간 귤이 대문 앞에 툭 놓여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겨울을 대표하는 제주의 감귤, 제주사람들은 언제부터 감귤을 먹었던 것일까?

고려시대부터 제주에서 귤을 먹어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민속원의 『귤록』에 따르면 제주의 귤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자세하고 확실한 기록은 아마 충암 김정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1520년)이 최초일 것이다. 충암 김정은 기묘사화에 연루돼 16세기 초엽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했는데 그때의 기록이 『제주풍토록』에 잘 남아있다. 중국 문헌에서는 남송(南宋)때 온주(溫州)지역의 군수를 역임한 한언직(韓彦直)은 1178년에 역사상 최초의 감귤에 대한 기록인 『귤보橘譜』가 대표적이다. ‘온주’라는 지명을 듣자마자 친숙하게 느껴졌다면, 맞다. 온주는 중국의 대표적인 귤 원산지이자, 우리가 ‘온주밀감’이라고 부르는 감귤 품종에 붙어있는 이름이다. 제주사람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귤’이라고 부르는 평범한 품종의 제주 귤이 온주밀감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나 한언직의 『귤보』를 알고 있는 분들은 온주밀감의 명칭이 중국에서 유래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그런데 제주에서 재배하고 있는 온주밀감은 일본에서 온 품종이다. 품종명은 ‘이부인’인데, 이부인이 중국여성부인의 이름이라고 하니 이 또한 재미있다.

일본에서 넘어온 최초의 온주감귤나무는 1911년, 서홍성당의 프랑스 신부였던 에밀 타케(한국 이름은 엄택기) 신부가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엄 신부는 일본 친구에게 한국자생 왕벚나무를 보냈는데, 그 답례로 온주감귤 14그루를 받아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중 1그루가 현재도 서홍동 복자성당 마당에 자리 잡고 있다. 

ⓒ이로이로
ⓒ이로이로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제주의 귤은 늦가을부터 지금까지가 한창 수확 시기다. 제주에서는 귤철이 되면 “관에 있는 조상님도 관 뚜껑 열고 나와서 귤 따러 가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귤 수확시기는 제주에서 일 년 중 가장 바쁜 기간이다. 그래서 이 귤철이 되면 모든 제주의 행사나 일정이 올스톱 되는 경우가 많다. 낮에 행사라도 하려 치면 다들 손사래를 친다. 애처롭게 붙잡아보아도 감귤밭에 가야 한다며 매정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리기 일쑤이다. 매정해 보이겠지만 그만큼 제주사람들에게 감귤이 중요하다는 의미며, 이는 백번을 말해도 모자라다. 제주 사람들이 겨울철에 시간이 나는 경우는 딱 한 가지 경우다. 바로 날씨 때문에 수확을 못 하는 날이다. 비나 눈이 많이 와서 귤을 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주사람들은 바쁜 봄, 여름, 가을을 지나, 다른 지역에서는 휴식을 즐기는 겨울마저 바쁘게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을맹질엔 추석보다 정월맹질인 설에 음식을 더 다양하고 많이 하는 이유가 일 년 중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가장 많은 시기가 감귤수확이 끝나는 정월 명절 즈음이기 때문이다.

귤은 추운 계절에 수확하는 과일이기 때문에 귤따러 가는 날에는 다른 계절보다 먹거리를 잘 챙겨야 한다. 추운 새벽부터 일찍 귤을 따러 나가야 하기 때문에 따뜻한 차와 커피는 필수다. 여기에 간식으로 냉동실에 쟁여 둔 상애떡과 지슬(감자)과 감저(고구마)를 챙겨 밭으로 나간다. 지들커(땔감)을 모아 불을 지피고 호일에 싸 둔 지슬과 감저, 상애떡을 불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감귤도 몇 알 같이 불에 밀어 넣는다. 몇 년 전 언론과 방송에 감귤을 불에 구워 먹는 것이 이슈가 되어서 구운감귤 레시피가 여러 번 방송에 나온 적이 있었다. 방송에서는 전문가들이 다양한 영양학적, 과학적 이유를 들어 구운감귤의 우수성을 설명했는데, 불현듯 나도 제주 사람들이 귤을 불에 구워먹는 이유가 궁금해져, 친한 친구의 부모님께 물어봤다. 그러자, 그 친구 부모님이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아이고 새벽부터 나와그네 귤 따젠 하면 막 춥지 안애? 겅해부난 미깡도 따뜻하게 해서 먹으라고 구워 먹는 거지 별다른 이유 어서.”

아시겠지만, 제주 사람들이 귤을 미깡이라고 하는 이유는 밀감(蜜柑)의 일본식 발음이 미깡(みかん)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부모님은 감귤을 구워서 먹은 이유가 단지 추워서라고 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집에서 따뜻한 아랫목에 굴러다니는 귤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거기에다 따뜻한 이불까지 잘 덮고 있다. 차가운 상태보다 따뜻할 때 귤의 당도가 높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제주 사람들의 지혜이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탐라순력도에는 제주 귤에 대한 기록인 귤림풍악(橘林風樂), 고원방고(羔園訪古), 감귤봉진(柑橘封進)이 있다.  사진은 제주시에서 발간한 탐라순력도 영인본. 제공 =요리책 수집가 서모란 소장. ⓒ제주의소리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탐라순력도 고원방고(羔園訪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다시 조선시대로 가보자.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형상은 제주목사 시절 제주지역을 탐방하면서 이 시기의 제주의 자연, 역사, 산물, 풍속, 인구, 행사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더불어 화공에게 본인이 제주지역을 돌아다니며 행한 것들을 기록한 그림을 그리도록 해『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제작하였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 보물 제652-2호로 국립제주박물관에서 보관되어 있고 현재 국보 승격을 추진 중인 중요한 화첩인데 이 탐라순력도에서 당연히 제주의 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총 세 개의 그림이 있는데 우선, 지금은 없어진 감귤농장을 그린 귤림풍악(橘林風樂), 고원방고(羔園訪古)가 있다. 마치 지금의 제주의 겨울철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샛노란 감귤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과 돌담, 그 곁에서 바람을 함께 막아주는 대나무가 전혀 어색하지 않고 그 색채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머지 한 점인 감귤봉진(柑橘封進)은 임금께 진상하기 위해 목관아에서 감귤과 한약재로 쓰이는 진피를 선별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나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데 여성들은 귤을 선별하여 분리하고 있고 그 곁에는 나무로 감귤 상자를 만들고 볏짚을 깔고 있는 남성들이 그려져 있다. 또한 진상하는 감귤의 종류도 무척 다양하고 그 숫자도 많았다.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특별전으로 <그림에 담은 옛 제주의 기억, 탐라순력도>를 온․오프라인으로 관람할 수 있다. 박물관에서도 제주의 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조선시대 제주의 귤과 전복, 흑우를 비롯한 다양한 특산품이 진상되었다. 올라간 제주의 귤은 외국 사신에게 선물로 보내지거나 과거시험에 합격한 성균관 유생들에게 귤을 주는 황감제라는 과거시험에 쓰일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제주에 과원을 설치하여 관아에서 관리하에 귤을 재배하여 올렸지만 진상해야 할 귤의 할당량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목관아에서 민가의 귤나무까지도 관리하면서 진상할 귤을 확보하였다. 감귤 진상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제주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감귤나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버리고 도망갈 정도로 고통을 겪었던 제주인들의 이야기는 제주사람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옛 이야기이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탐라순력도 귤림풍악(橘林風樂).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탐라순력도 감귤봉진(柑橘封進).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이런 감귤 진상은 갑오개혁 이후 진상제도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에 따라 대부분의 감귤나무는 그냥 방치되거나 버려지게 된다. 얼마나 애환이 깊었으면 그 나무들을 그냥 버렸을까? 한편으로는 이렇게 버려지지 않았다면 좀 더 다양한 토종 감귤 종자들이 잘 보존되고 유지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환금작물과 제주농민문화』(김창민 저, 1995)라는 연구서를 살펴보면 제주사람들에게 외면 받았던 제주의 귤은 1960년대부터 수입을 위한 환금작물로 재배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온주밀감은 일제시대 제주에 들어왔지만, 본격적으로 제주의 감귤재배가 활성화 된 것은 1960년대 정부에서 농특사업의 일환으로 감귤재배를 권장하였고 재정적인 지원과 함께 묘목을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재일교포들도 자신들의 고향 마을에 모묙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제주 밖에 있는 사람들도 고향 제주에 대한 애정을 귤나무에 담아 보낸 것이다. 이 당시에는 감귤나무 하나면 대학생 한 명을 교육시킬 수 있다 하여 대학나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학나무라는 단어는 비단 제주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는 아닌 것 같다. 육지의 고흥에서도 유자를 대학나무라 부른다. 이 ‘대학나무’라는 용어는 그 지역에서 경제적 기반을 다졌던 중요한 과일나무를 뜻하는 용어로 통용되는 것 같다.

물론 온주밀감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1980년대처럼 지금의 제주귤이 높은 가격을 받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 과잉생산으로 인해 감귤의 가격이 떨어지자 등장한 만감류가 바로 부지화, 우리가 한라봉으로 알고 있는 품종이다. 제주의 귤도 점점 진화하여 다양한 만감류들이 나오고 있고 우리가 겨울철 과일로 알고 있었던 제주의 귤은 거의 사계절 내내 만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지인의 참다래밭에서 참다래를 따고 있었는데 지인께서 갑자기 나무에 달린 처음 보는 귤을 따서 반을 가르더니 먹어보라고 건네주었다. 한 입 베어무니 이전까지 먹어보지 못했던 자몽의 씁쓸하고 시원함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이 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았는데 그 귤의 이름은 팔삭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어른들한테 들은 재미있는 귤 이름이 꽤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벤줄’이라는 귤도 있었고 호라이깡이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특히 호라이깡은 먹으면서 “뭐야 이거 먹으면 호랑이처럼 힘 세져?”라며 웃었던 유년시절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어느샌가 이러한 제주의 귤은 점점 기억 속에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1521년 충암(忠庵) 김정(金淨)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 의하면 제주에 보배로운 것 중 하나는 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500여년 전 시선에도 보배로운 것으로 보여졌던 귤이었나보다. 비단 그때뿐이랴, 지금도 역시 제주사람들에게 귤은 보배라고 생각할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새해가 와도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런 시기에 온 가족이 함께 따뜻한 방안에 둘러앉아 이불 속 감춰둔 달콤한 귤을 까먹으면서 서로의 신년 소원을 나눠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보내보면 어떨까? 제주 귤과 함께라면, 몇년 후에도 기억에 남을 보배로운 시간이 될 것 같다.

김진경은?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에서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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