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전문가 칼럼](2) 혼란의 시대, 고전서 답을 찾으라 / 이유선 교수·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코로나19의 장기화에 따라 우리의 일상과 삶이 위드(with)코로나와 포스트(post)코로나 시대로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2021년 새해를 맞아 코로나19 펜데믹 이후의 미래를 준비하는 각 분야 석학과 전문가 목소리를 싣는 신년기획 전문가 칼럼을 마련했습니다. / 편집자 

 

이유선 서울대 교수(기초교육원, 철학)
이유선 서울대 교수(기초교육원, 철학)

1. 팬데믹의 시대,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간혹 이것이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길을 가다가 사람이 보이면 마스크를 했는지 먼저 살피고, 너무 가까이 다가서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상황, 친구뿐 아니라 같은 공간에 살고 있지 않다면 가족과도 식사를 함께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니. 이 세상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인류적인 차원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던지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에 답해 온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그리고 철학은 늘 세상의 변화를 초월한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을 자처했으므로, 이런 혼란의 시대에 마땅히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철학이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시대일수록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고전에 담긴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시대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기획된 전문가 컬럼 시리즈라는 중요한 지면을 나 같은 얼뜨기 철학자한테 할애한 것도 아마도 철학 전공자의 혜안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런 통찰력이 없는 필자는 마땅히 글쓰기를 거부했어야 하지만, 이런 기회에 철학의 역할에 대해 짧은 생각을 말해 보는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니라고 여겨져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면한 문제에 당장 답을 줄 수 없는 철학자들이 즐겨 써먹는 변명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는 헤겔 법철학 서문의 구절이다. 헤겔은 ‘자유’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썼다. 인간이 자유롭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유라는 개념이 분절되어 구체화되는 역사적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겪을 것을 다 겪고 난 후에 비로소 철학자의 사유가 그것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철학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일어난 일에 대한 개념적인 정리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갈 삶의 지혜라면 철학은 겪지 않은 어떤 것에 대처할 초역사적인 어떤 삶의 원리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환경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 그리고 시간에 따라서 변화무쌍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런 원리에 우리의 삶을 내맡긴다는 것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사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마저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 환경의 변화를 무시하고 영원한 진리를 고집한다면, 어떤 철학자가 자신이 그런 진리를 깨달았다고 자처한다면, 그것은 마치 함께 모여 행하는 기도가 우리를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신자들을 감염시키는 종교지도자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철학이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개념적 정리를 하는데 그치거나, 일반인들은 모르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자기만 알고 있다는 식으로 지적인 사기를 일삼는 학문이라면 철학은 없어져야 할 쓸데없는 학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헤겔식의 종합적인 사유가 거기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 의미를 확장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환경의 위협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1919년 도쿄 제국대학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 간 존 듀이는 8개의 강연을 하고 그것을 『철학의 재구성』(이유선 역, 아카넷, 2010)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당시 듀이의 문제의식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가져 온 사회, 경제, 문화 영역의 변화에 걸맞게 철학이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듀이는 헤겔과 유사하게 철학적 사유는 시대적인 배경을 갖는다고 보았다. 예컨대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본질과 현상, 진리와 비진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철학은 귀족과 노예, 봉건 영주와 농노와 같이 신분적인 구별이 존재했던 시대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신분적인 질서가 철폐되었음에도 그런 식의 철학이 지배적인 이유는 여전히 경제적인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적 차별을 극복한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라면 구시대의 신분적, 계급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던 철학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듀이는 철학이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해 온 태도를 버리고 자기 수정과 자기 비판이라는 과학적인 태도의 덕목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팬데믹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헤겔적이고 듀이적인 관점의 철학자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우선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당장 제시할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아직 팬데믹 시대의 황혼을 맞지 않은 상황에서 사태의 정황을 주시하고, 우리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철학자 개인의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해 ‘과학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전문가들 및 고통을 구체적으로 겪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2. 몇 가지 물음
철학자연하면서 우리 시대의 고통이 어떠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해 보았자, 그것은 그 사람의 견해일 뿐이다. 삶의 문제는 다양하고, 그에 따라 대처 방식도 달라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태도이다.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어떠한 고통에 긴급히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시민적인 의무이다. 문제의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태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자료에 의존해야 한다. 

예컨대 얼마 전에 온라인으로 진행된 ‘2021 대한민국 종합미래전망’(http://www.futureforecast.kr)은 26개 국책연구기관 및 외부기관의 전문가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가 당면한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행사였다. ‘국가사회발전 7대지수’ 연구를 기획한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정용찬 본부장은 여러 연구기관에서 연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자살율 OECD 1위, 노동시간 OECD 1위, 낮은 행복지수, 삶의 만족도 OECD 32위, 높은 계층 간 소득 불평등 등이 ‘포용적 국가사회 발전’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로 언급되었다. 소위 K-방역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성공적이며, 그에 힘입어 경제 영역에서 비교적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팬데믹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며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고 있고, 빈부 격차에 따른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다. 

철학이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시대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여야 한다면 데이터가 보여주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탐구에 나서야 할 것이다. 계층 간 소득 격차를 줄이고,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삶의 만족도와 행복지수가 상승할 것이고 자살율도 줄어들 것이다. 팬데믹의 상황은 미적대면서 미루어오던 몇 가지 사회적 실험을 앞당겼다. 비대면 수업의 전면화라든가, 재택근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긴급지원금 등이다. 이런 실험들은 우리가 생활하는 시공간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 재화를 어떻게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한 지 등에 대해 많은 의문을 남겼다. 

사태가 진행 중이므로 개념이 명료해지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문제가 맹아적인 형태로 드러난 듯하다. 어느 나라에서나 예외 없이 집회와 만남을 금지하는 정부의 명령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인 이유에서 저항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표현할 자유를 주장했다. 이사야 벌린이 ‘늑대의 자유는 양들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팬데믹의 상황은 나의 자유가 내 가족의 죽음을 가져올 수 있음을 입증했다. 자유의 문제는 공동체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이제 우리가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조건으로서 우애의 문제를 고민할 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 사람의 감염자라도 남아 있다면 팬데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공동체는 여전히 차별과 억압이라는 질병에 감염된 채 남게 될 것이다. 철학은 이제까지와는 없었던 방식의 사회적 연대를 가능케 할 어떤 ‘개념’을 찾아나서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철학자연하는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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