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김헌범 논설위원·제주한라대 교수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역사의 진보는 스스로 이뤄지지 않는다

적폐의 땅

요즘 세계적 화제작인 다큐멘터리 영화 『위기의 민주주의, 룰라에서 탄핵까지』는 수십 년의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온 국민의 열망 속에 탄생한 브라질의 민주주의가 한순간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다룬다. 이 다큐는 민주진영의 호세프 대통령이 탄핵으로 직에서 끌어내려지고 룰라 전 대통령이 차가운 철창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상황에서 시작해 그 이면에 숨은 이유와 진상을 차분한 영상으로 비춰준다. 이 영화의 내레이터는 열렬한 민주운동가 집안의 출신이지만 최대한 절제되고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판단을 관람자들의 몫으로 맡긴다. 

그러나 퇴임 시 80%의 기록적인 지지율을 기록했으며 아직도 국민들의 절대적 존경을 받는 룰라가 수많은 지지자들의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진해 경찰의 호송차에 올라타 감옥으로 향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내레이터는 끝내 울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국에서 태어난 노예보다 혹독한 노동으로 죽어간 노예가 더 많은 나라,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들여오는 게 더 싼 나라”의 오명을 지닌 브라질. 이 뿌리 깊은 ‘적폐의 땅’에서 일궈낸 브라질의 민주화는 사막에서 꽃을 피워내는 기적으로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말이다. 

민주주의의 역설

민주화를 이루기까지 수많은 이름 없는 민주시민들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적인 희생은 모든 것에 보상이 따라야 하는 자본주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한낱 한여름 밤의 허망한 꿈으로 스러지며 과거의 독재정권 시절로 빠르게 회귀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개혁이 혁명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지시하고 있음은 충분히 눈치 챌 수 있다. 민주적 시스템은 독재정권들에 기생하며 특권을 유지해온 기득권층에게 역설적으로 합법적인 튼튼한 보호막이 돼줬던 것이다. 

내레이터는 “민주주의는 오직 특권층이 위협을 느낄 때만 작동된다”는 고대 그리스의 어느 현자의 지견(智見)을 냉소적인 어조로 읽어나간다. 민주운동가 출신이자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각광을 받은 호세프가 룰라의 정책기조를 이어받아 노예제 시절부터 수백 년을 이어온 오랜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본격적인 제도개혁에 나서자 위기감을 느낀 기득권층은 급속도로 결집한다. 자신들의 “특권 지키기”에 그들이 이용한 것은 민주화의 결실로 독재정치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민주적 장치인 의회의 탄핵권이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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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한조각의 배신

탄핵소추권을 지닌 하원과 탄핵결정권을 보유한 상원은 여전히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보수정당들이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금권선거가 횡행하는 브라질의 정치판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적어도 의원선거만큼은 가난한 국민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투표가 가져올 미래보다 빵 한 조각의 현재였다. 이들이 상,하원 의원으로 선택한 것은 정직하지만 가난한 후보가 아니라 매표의 대가로 몇 푼의 돈을 건네주는 부패한 후보들이었다. 그리고 정치를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정치인들과 기득권층 간 더러운 거래가 이뤄지는 악순환이 이뤄졌다. 

따라서 언제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유권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언제라도 퍼주는 기득권층을 정치인들이 대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기득권층의 “아바타”로 전락한 보수정당 의원들이 기득권층의 이익을 방어하고 “그들만의 리그”의 과거로 회귀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 대통령 탄핵이었다. 하지만 탄핵은 합법적 과정의 탈만 썼을 뿐 사실상 민의를 뒤엎는 쿠데타였다. 의회를 장악한 보수정당들이 단순한 회계오류를 권력형 부패로 부풀리고 탄핵사안으로 만들어 국민들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을 몰아낸 것이다.   

룰라의 논두렁 시계

룰라의 기소는 더 억지였다. 한마디로 브라질 판 “논두렁 시계”에 비견할 수 있다. 룰라가 대통령 재임시절 한 건설회사로부터 아파트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검사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행사함은 물론 판결까지 내리는 판사 역할까지 겸한다. 담당 검사는 룰라에 대해 한 차례의 소환조사도 없이 기소를 강행했다. 얼마 전 우리 검찰이 조국 전 장관의 아내를 조사도 없이 서둘러 기소부터 하는 모습과 판박이다. 하지만 검찰은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를 단 한 개도 내놓지 못했다. 이에 대한 검사의 변명이 역대급 가관이다.

 “룰라가 아파트 소유자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가 완벽하게 자신의 범죄를 숨겼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친일언론들의 땡전뉴스 

궤변과 함께 검찰이 사용한 무기는 역시 언론이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브라질도 주요 언론을 몇 개의 유서 깊은 가문들이 장악하고 있다. 검찰이 룰라의 뇌물혐의를 일목요연한 도표로 만들어 파워포인트로 띄우고, 이를 재판정에 몰려든 언론들이 방송 화면과 신문 지면에 담아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더 이상의 증거 공방(攻防)은 필요하지 않았다. “빈자(貧者)들의 성인(聖人)”으로 칭송을 받을 만큼 평생 청렴한 삶을 살아왔던 룰라는 ‘여론재판’만으로 이미 파렴치범이 돼버렸고, 결국 11년의 징역형이 확정된다.

그동안 극심한 빈부격차의 해소에 주력했던 진보정권에게 복지정책의 주요 재원이었던 최대 국영석유회사는 보수정권이 복귀하자 즉시 미국의 어느 대기업의 소유로 넘겨졌다. 이 이른바 연성(軟性) 쿠데타의 또 다른 배후가 누구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단지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 기득권층과 이들에 기생하는 언론인들과 정치인들, 엘리트의식에 젖은 사법부와 관료들, 그리고 매판자본의 카르텔은 여전히 탄탄했다. 이 철옹성을 깨뜨리기 위해 민주적으로 개혁의 칼을 들이댄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것이다.   

절반의 쿠데타

이러한 브라질의 상황이 결코 남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촛불혁명이 성공한지 4년이 지난 우리나라도 비슷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대통령이 임명한 법무부장관이 검찰의 “먼지 털기” 수사에 의해 조기 낙마하고, 대통령이 재가한 검찰총장 징계마저 사법부에 의해 무산되는 사태는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면 대통령의 손발을 꽁꽁 묶고 있는 셈이다. 친일후손들이 장악한 주요언론은 또 어떤가. 군부독재시절 소리 높여 독재를 찬양하던 “땡전 뉴스”는 이제 “땡하면 기승전문재인 탓 뉴스”로 국민들을 현혹하는 상황이다. 

정권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군부독재시절과 다를 바 없다. 돈을 무기로 휘두르는 최상층의 재벌 왕족, 광고라는 먹이사슬에 기생하는 언론,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해 통제받지 않는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 자본의 특권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관료조직, “유전무죄”의 판결로 기득권층의 든든한 법적 방패가 돼주는 사법부. 대통령을 “식물”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게 바로 이들 과두(寡頭) 기득권 동맹일 것이다. 국회만 다수를 뺏기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 판 연성쿠데타의 완결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과거로 회귀하려는 힘이 미래를 지향하는 힘을 상당히 잠식하고 있는 이 위급한 시기에 절망에 빠져 있을 촛불들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안타깝지만 다음 한 마디밖에 없다. “역사는 스스로 진보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다.” / 김헌범 논설위원, 제주한라대 교수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룰라에서 탄핵까지' 포스터. 출처=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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