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문제” 판단 섰다면 진작 제기 했어야

2014년말 제주도와 도의회가 정면 충돌한 ‘예산 전쟁’은, 결과적으로 도의회 쪽에 더 큰 내상을 입혔다. 새해, 그러니까 2015년도 예산안은 두 번의 부결 끝에 도의회 본회의를 가까스로 통과했다. 

집행부로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편성액 대비 무려 4.4%나 잘려나갔다. 금액으로는 1682억원. 역대 최대 규모였다. 원희룡 도정 출범 원년에 세운 이듬해 재정운용의 얼개가 틀어질 판이었다.

다만, 도의회는 삭감한 예산 전액을 예비비(1억9200만원)와 내부유보금(1680억800만원)으로 돌렸다. 양쪽 모두에게 ‘퇴로’는 열어둔 셈이었다. 당시 처음 도입된 내부유보금은 추경을 통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예산이기 때문이다. 

사실 원 도정의 입장에서는 계획한 일부 사업의 추진을 늦추면 그만이었다. 정치적인 뒷감당은 도의회의 몫이었다. 

예산 전쟁은 의장이 ‘예산 협치’를 한다며 예산 편성 전 도의회와의 협의를 요구한데서 비롯됐다. 이게 일반에는 의원 재량사업비 부활을 위한 꼼수로 비쳐졌다. 그 와중에 원 지사는 전국 라디오 방송에 출연, 일부 의원들이 “20억원을 보장해주라”고 했다고 주장해 기름을 끼얹었다. 

전에없던 사전 협의 요구는, 줄곧 중앙 무대에서 성장한 젊은 도백을 상대로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라는 시각도 존재했다.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의장은 여러차례 “그게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추는 이미 기울었다. 반면 원 지사는 끝까지 원칙을 지키는 강단있는 리더로 부각되기도 했다. 

당시 의장의 이 한마디는 수싸움(?)에서 밀린 그의 심정이 어땠는지 잘 드러난다.

“의회를 여론몰이로 벼랑 끝에 몰아넣는 싸움 방식과 정치적 연출로 상처 난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배우게 된 정치적 학습효과를 오래 기억하겠다” 와신상담이 따로 없었다.

20억 요구설을 둘러싼 ‘그 날의 진실’은 숱한 공방만 남긴 채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워낙 드라마틱 했던 탓에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헷갈린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예산 협치라는 포장을 두르긴 했어도 사전 협의 요구는 애당초 예산편성권 침해로 비쳐질 소지가 다분했다는 점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떠올리기 싫은 이전투구를 다시 소환하는 것은 최근 양쪽 사이에 6년여 전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어서다. 

원만하게 처리된 줄 알았던 2021년도 예산 가운데 일부를 제주도가 배정을 전격 유보해버린 것이다. 이 또한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배정 유보 예산은 126억7499만원. 총예산(5조8298억원)에 비하면 큰 비중은 아니다. 의회 심의 과정에서 신규 편성된 사업이 주요 타깃이다. 

설사 그럴 권한이 있다 해도 모양새가 영 매끄럽지 않다. 

지난해 12월15일 정례회에서 도의회는 411억여원을 감액한 후 주민불편해소 사업 등에 399억8900만원을 증액하고, 나머지는 예비비로 돌렸다. 

이에 원 지사는 ‘동의’ 의견을 냈고, 예산안은 그대로 의결됐다. 그 전의 예산 심의도 비교적 순탄했다. 

당시 원 지사는 인사말을 통해 의회에 감사 인사를 건넨 뒤 “민생경제를 회복시키는 소중한 재원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랬던 원 지사가 한달도 안돼 180도 태도를 바꾼 셈이다. 

과거 예산 전쟁이 잘잘못을 떠나 도의회 발(發)이었다면, 이번에는 제주도가 뒤통수를 친 격이다. 의회 내부에선 ‘양두구육’이라는 격한 언사까지 나왔다. 

예전에도 제주도가 사업비를 배정하지 않아 예산이 집행되지 않은 사례는 있었다. 그 경우에도 대상은 예산안 처리 때 ‘부동의’ 의사를 밝힌 사업들로 한정됐다. 

돌이켜보면, 의회 심의 단계에서 새로 편성되거나 증액된 예산 중에는 선심성 혹은 끼워넣기식 예산이 적지 않았다. 지난 연말 제주도가 그런 판단을 했다면, 항목별로라도 부동의 의견을 냈어야 옳았다. 순서가 그렇다는 얘기다.

제주도는 내부적으로 신규 편성 및 증액 예산에 대해 해당 부서에 소명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번 예산배정 유보 방침은 여러모로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한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협치를 부르짖던 제주도와 도의회 간에 협치·소통은 고사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매커니즘 조차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새삼 각 기관의 존재 이유를 묻게된다. 원래 자치단체와 지방의회는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그게 건강한 파트너십의 실종까지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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