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희의 예술문화이야기] (46) 1세대 현대미술가들의 예술혼 느껴져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에서 한국미술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소박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미술관 관람이 여의치 않지만 지난 10월 시작된 전시 ‘미지에의 도전, 현대미술가협회’는 김창열 작가가 20대에 참여했던 그룹 ‘현대미술가협회’(1957-1960, 이하 현대미협)를 조명하며 6.25이후 혼란 속에서 꽃 핀 미술을 되돌아보게 한다. 당시 제작된 김창열의 작품부터 박서보, 이양노, 장성순, 정상화, 조용익, 김서봉 등의 작가들의 추상회화 작품과 더불어 오래된 전시 브로슈어들도 한쪽에 전시되고 있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장 패널.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전시는 소박하고 도록도 없지만, 사실 이 협회의 출범이나 작가들의 역할은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특히 지난 5일 사망한 김창열 작가의 청년기를 보여주는 전시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현대미협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추상미술’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 협회의 역사적 역할에 크게 기여한 한 미술평론가가 있는데 이번 기회에 그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싶다. 

1950년대 후반의 서울은 여전히 폐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6.25가 끝나고 난 후 서서히 일상을 회복하고 있었으나 새로운 예술을 추동시킬 여력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서 경찰로 근무했던 김창열, 광주의 한 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받던 박서보 등 젊은이들은 서울로 올라와 청년작가로서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술제도는 기존의 사회제도와 마찬가지로 주류와 기득권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며 새로운 미술에 소극적이었다. 1949년 출범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은 일제 강점기에 등장한 조선미술전람회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했고, 심사위원을 위촉하여 수상자를 선정하는 제도로 논란을 일으키곤 했다. 심사위원이 누구인가에 따라 수상자도 달라졌기 때문에 국전의 주도권을 두고 갈등이 심했다. 1955년경 미술단체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며 급기야 1956년 국전 보이콧 사건이 벌어진다.

청년 작가들은 이런 구도에 실망을 하고 ‘반국전’을 내걸고 독립적인 전시를 추진하게 된다. 1956년에 열린 ‘4인전’을 시발로 청년작가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그 결과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가 등장했다. 현대미협은 이후 1년에 여러 번 전시를 하며 박서보, 김창열, 김서봉, 하인두 등 청년작가들이 모이는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해가 갈수록 더 많은 청년 작가들이 참여하며 세력화하게 된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전시장면 '미지에의 도전, 현대미술가협회'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박서보는 당시 안국동의 ‘이봉상미술연구소’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김창열은 낮에는 경찰에서 일하고 퇴근하다 이 연구소에 들려서 함께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미술대학이 많지 않던 시절에 ‘미술연구소’는 오늘날의 학원과 같은 역할도 했고 선생의 성향에 따라 배우는 내용도 크게 달랐다. 이봉상은 사실상 명의만 빌려주고 실질적으로는 박서보가 연구소를 꾸리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현대미협 작가들은 이곳을 아지트로 사용하곤 했다. 

이즈음 이 연구소에 나타난 새로운 인물이 방근택이다. 방근택은 박서보가 광주의 군사학교에서 한때 알고 지냈던 장교이자 교관으로, 철학을 전공하고 서울의 한 영화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독서를 좋아하고 미국잡지 등에서 본 미술, 음악, 영화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특히 문학을 좋아해서 언젠가 문학평론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기성세대와 다른 길을 가고자 했던 박서보는 그의 박학다식에 매료되었고 ‘현대미술가협회’ 3회전(1958)에 초대하여 이 전시의 리뷰 겸 평론을 부탁한다. 방근택으로서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이 뭔가를 갈망하는데, 의외로 해외의 미술동향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에 연민을 느끼며, 자의반 타의반 글을 발표한다. 그렇게 나온 ‘회화의 현대화문제’(1958)는 그들에게 첨예한 현대미술의 이슈를 담은 글이자 그의 첫 평론이 되었다. 그리고 안국동 미술연구소의 현대미협 작가들과 어울리며 의도치 않게 미술평론가의 길을 가게 된다. 

방근택의 첫 평론은 청년 작가라면 선배의 영향이나 외국의 모방을 넘어서 자신의 문제를 정신적으로 구명하여 추상미술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프랑스, 일본에서 등장한 ‘앵포르멜’ 미술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모두 염두에 두고 추상이야말로 새로운 예술이 지향해야 할 지점이라고 확신했다. 이미 미술이 국경을 넘어 보편적 문화로 확산되고 있는 시대적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방근택은 현대미협 작가들을 위해 프랑스 앵포르멜 회화에 관련된 글을 수입해서 번역하여 주기도 하고, 연구소에서 추상미술의 표현방법을 직접 시범으로 보여주면서, 물감과 붓에 작가의 존재를 담는 행위를 시연하기도 했다. 그의 열정과 청년작가들의 호응은 결실을 맺는데, 1958년 12월 덕수궁에서 열린 제4회 현대미협전은 소위 ‘뜨거운 추상미술’의 향연이 된다. 한국미술사에서도 이 전시는 ‘한국 최초의 앵포르멜의 집단적 출현’이자 추상미술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전시로 평가된다. 방근택은 이후에도 1959년 열린 제5회전을 위해 ‘선언문’을 작성해 주며 사실상 현대미협의 정신적 가이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196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4.19와 5.16을 겪으며 미술단체들이 해산되기도 하고, 갑자기 주목을 받은 그들의 추상미술을 따라하는 소위 ‘영혼이 없는’ 작업들이 쏟아지면서 또 다른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게 되는데, 정작 방근택으로서도 그 길은 예측할 수 없었다. 

196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파리비엔날레 등 해외의 전시에 참가할 작가선정을 두고 미술계의 대립이 심화되며 작가 그룹들의 세력화로 이어진다. 현대미협 작가들은 그 와중에서 혜택을 누리게 되고 방근택은 그런 태도가 작가로서의 태도가 아니라 정치적인 행보라고 여러 글에서 비판을 하는데 결국 서로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분열된 미술계를 뒤로 하고  김창열은 1966년경 한국을 떠났고, 이후 미국을 거쳐 프랑스에서 물방울 화가로 성장했다. 박서보는 프랑스, 일본 등 해외 미술 전시에 참여하며 미술계의 주류로 부상했고 1970년대 단색화를 주도하게 된다. 방근택은 그들과 멀어진 채 외롭게 수많은 평문을 쓰다가 1992년 사망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오래전 칠한 물감과 캔버스 뒤로 뜨거운 열정으로 예술혼을 태우던 그들의 시대가 미약하게나마 느껴진다.

필자 양은희

양은희는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졸업한 후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을 공부했으며, 뉴욕시립대(CUNY)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조우: 제주도립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전>, <연접지점: 아시아가 만나다>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여러 미술잡지에 글을 써왔다.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살펴 본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공저, 2017)의 저자이자 『기호학과 시각예술』(공역, 1995),『아방가르드』(1997),『개념 미술』(2007)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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