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열 두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깊은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김두규 교수(60, 독일뮌스터대학 독문학 박사, 전주 우석대, 풍수지리학)는 2003년 7월10일 우리문화 우리풍수에서 ‘바굼지 오름에서 추사체의 영감을 얻었지 않은가’로 의문을 제시한다. 박쥐 산 또는 단산이라고 하는데 그 형상이 날개 펴서 먹이 덮칠 듯 ‘흉한 기운’의 산이라는 제주 바굼지 오름(154m)은 산방산(山房山) 앞에 있다. 박쥐 오름 앞에 있는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가 있고 박쥐 오름의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세운 방사탑이 있다. 

‘땅과 인간이 서로 닮아간다’는 지인상관론(地人相關論)은 풍수가 전제로 하는 명제다. 단순히 서로 닮아가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생기는 여러 갈등을 두고 때로는 대립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협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제주도에서 관광지로 유명한 산방산 앞에 기괴한 산이 하나 있다.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와 대정읍 인성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단산(簞山)’, ‘박쥐 오름’, ‘바금쥐 오름’, ‘파군산’(애월 하귀리 파군봉 84.5m 오름도 있다, 고려 몽고연합군이 삼별초를 물리친 곳) 등으로 불린다. 제주도 특유의 기생 화산인 ‘오름’은 제주도에서는 산으로 통하기 때문에 박쥐 오름이다. 바굼쥐 오름은 박쥐와 닮은 형상의 산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이곳에 처음 와보는 사람도 이 산을 보면 자연스럽게 박쥐를 연상한다. 그런데 이 박쥐 모양의 산과 이 산 주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사람들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산은 박쥐가 날개를 활짝 펴서 먹이를 덮치고 있는 형세로 마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기세에 눌려 마을에서 큰 인물이 날 수 없다고 믿었다.

산방산 정상에서 바라본 바굼지 오름. 출처=장태욱, 오마이뉴스.
산방산 정상에서 바라본 바굼지 오름. 출처=장태욱, 오마이뉴스.

민간에서만 이 산을 흉산(凶山)으로 본 것이 아니었다. 300년 전인 1702년(숙종 28년) 당시 제주 목사 이형상(李衡祥)이 제작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는 이 산 이름을 ‘파군산악(破軍山岳)’으로 표기하고 있다. ‘파군’이란 이름이 붙은 데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옛날 이곳에서 적군을 패퇴해 ‘파군(破軍)’이라고 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풍수에서 산의 형상을 아홉 가지(九星)로 나누는데 이 산의 모양이 그 가운데 ‘파군(破軍)’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실제로 풍수에서는 이와 같은 모양의 산을 ‘파군’이라 부르며 아주 흉한 산으로 본다. ‘파군의 산이 있으면 형벌과 겁탈, 나쁜 질병을 유발 한다’고 하는데 당시 제주 목사가 이 박쥐오름을 ‘파군’으로 표기한 것이 흥미롭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900년(광무 4년) 이문사(李文仕)라는 사람이 “풍수적으로 마을 남쪽(박쥐오름 쪽)이 허하여 마을에 액운이 있으니, 탑을 쌓아서 액을 막으라”고 해 마을 사람들은 산과 마을 중간에 4개의 ‘거욱대’를 설치하였다. ‘거욱대’란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것으로 ‘방사탑(防邪塔)’이라고도 하는데, 둥근 돌탑을 쌓은 뒤 그 위에 사람 얼굴 형상을 한 석상을 올려놓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1951년 이곳에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서면서 ‘거욱대’ 3기를 헐어 막사 신축용 자재로 써버렸다. 그 후 이곳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괴질이 발생하는 등 불행이 잇따르자 1961년 거욱대를 원상복구하면서 인성리 마을뿐만 아니라 그 반대쪽에 있는 사계리에도 방사탑을 쌓아 이 산의 흉한 기운을 막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김정희의 추사체와 이 박쥐산의 관련설이다. 추사 김정희가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대정읍 안성리 적거(謫居)지 마당에서는 이 박쥐오름이 빤히 바라다 보인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는 단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험악하고 괴이한 아름다움’이 특징이다. 이곳 사람들은 “추사의 기괴한 글씨체가 바로 이 박쥐오름의 모양새를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추사의 글씨체와 이 박쥐오름(파군산)을 비교해보면 ‘땅과 인간의 상관관계(相關關係)’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김두규 교수의 촌평이다. 단산(簞山)은 양 갈레로 머리를 땋은 시골 처녀의 아름다우면서도 순수한 요망진 모습이다. 60년전 수없이 걸었던 안성 길가, 예나 지금이나  수선화가 하얗게 피었다. 잘 어울린다.

1월 8일 ‘제주의소리’에 ‘세한도의 봄날 바람, 제주를 먹여 살릴 세계연구소를 만들자’의 필자의 제안 글이 나간 후, 모슬포 보성, 인성, 안성 등 5개 마을 이장단과 양병우 의원, 읍장 등이 연구소 유치 작업에 나섰다.

# 이문호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 전기통신 기술사(1980)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울릉공- RMIT대학, 독일 뮌헨,하노버-아흔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최초 Jacket 행렬을 발견했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과학기술훈장 도약장,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선정, 2018년 한국공학교육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주문화의 원형(原型)과 정낭(錠木) 관련 이동통신 DNA코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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