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13) 커피 한 잔의 향 + 안팎으로 취할 수 있는 분위기, 윈드스톤 

마을책방은 단순한 기호품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대형서점처럼 책을 어마어마하게 팔아치우는 곳은 더욱 아닙니다. 후미진 도심 골목이나 시골 언저리에서 마을책방을 만난다면 그것은 행운이지요. 마을 초입 팽나무 아래 마을사람들이 모여들듯 책벌레들이 도란도란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입니다. 제주도 마을 곳곳에 작은 책방들이 사람을 살리고, 다시 사람이 마을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을책방의 가치입니다. [제주의소리] 시민기자 고봉선 시인이 바람을 쐬듯 책방마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마을 책방’에서 책방지기의 책 살림 이야기를 시인을 통해 듣습니다. [편집자 글] 

 

登高南嶽擧深觴(등고남악거심상): 남악(南嶽)에 높이 올라 대폿술 마시고
川上歸來興更長(천상귀래흥경장): 냇길 따라 내려오니 흥이 절로 새로워라
滿眼黃花如昨日(만안황화여작일): 들국화는 만발하여 예와 같으니
一樽仍作兩重陽(일준잉작양중양): 한 동이 술이 두 중양(重陽)을 이루네.

이원진 목사, 〈무수천가찬시(無愁川佳讚詩), 탐라지〉

무수천가찬시(無愁川佳讚詩)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효종 때 제주목사를 역임하였던 이원진 목사의 저서 「탐라지(耽羅誌)」에 실린 한시다. 탐라지는 1653년(효종 4년) 이원진이 편찬한 제주도 제주목 · 정의현 · 대정현의 읍지(邑誌)로, 자연환경 ‧ 인물 · 시문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특성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록하여 17세기 중엽의 제주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광령1리는 제주시와의 경계선인 무수천에서부터 시작된다. 무수천가찬시에서 보다시피 마을의 명소로는 단연 무수천 8경을 꼽을 정도로 계곡이 아름답고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책방 여행 지도를 살피던 중, 엎드리면 코 닿을 곳 광령1리에 책방 윈드스톤이 있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며칠 동안 연이어 함박눈이 쏟아졌다. 책방 윈드스톤으로 출발하기 전, 뒤뜰에서 아들이 만든 강아지 눈사람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코로나19 기세에 눌려 집콕 신세다. 설상가상으로 며칠째 폭설까지 쏟아졌다. 도저히 집을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마침 남편이 광령마트에 간다고 했다. 따라나서려는데, 아들 녀석이 맨손을 호호 불며 뒤뜰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강아지 눈사람이었다. ‘녀석에게 이런 재주가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셔터를 눌렀다.

폭설을 뚫고 책방 윈드스톤을 찾았다. 익숙한 장소다. 버스를 타고 다닐 때 늘 지나던 곳이기 때문이다. 

“아기를 낳으며 머무른 제주”
제약회사에서 일하던 책방지기 이언정 씨의 남편은 일 관계로 혼자 제주에 와 있었다. 그리고 본인은 서울에서 어린이 책 편집 디자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둘째를 가지면서 쉬기도 할 겸 남편 곁으로 왔다. 그 후 아기를 낳고 제주에 머무르게 되었다. 5년 전이었다. 

책방지기가 제주에 머무르게 된 동기는 남편이라는 기둥이 있었다. 하지만 여유롭게 다가오는 분위기며 사로잡는 자연의 매력이 더 컸다. 바로 옆에는 학교도 있고, 아이들이랑 다니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 쫓고 쫓기는 생활을 하다가 온 그로서는 제주가 지상낙원이었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남편은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결국 제약회사를 그만두고 제주에서 카페를 차렸다. 이언정 씨도 자신만의 공간에서 작은 책방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남편이 운영하는 카페 한쪽에서  책방을 열며 이언정 씨는 책방지기가 되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찻길에서 바라본 윈드스톤. 늙은 팽나무가 수호목인 듯 서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어린이 책 편집 전문가 자녀의 책읽기”
12년 정도 어린이 책 편집일을 한 이언정 씨는 이미 그 분야에선 전문가다. 어린이 책 편집 전문가인 이언정 씨는 예비 5학년인 아들과 이제 막 일곱 살이 되는 남매를 두고 있다. 첫째가 어렸을 때 이언정 씨는 많은 책을 읽어줬다. 그런데 지금은 좀 컸다고 책보다는 컴퓨터 게임을 더 좋아한다. 둘째는 어려서인지 아직은 엄마와 아빠가 책 읽어주는 걸 더 좋아한다. 

내가 어릴 땐 혼자 놀 수 있는 놀이가 거의 없었다. 놀이도 계절에 따라 달랐다. 여름엔 공기놀이에 숨바꼭질, 자치기 등이었고, 겨울엔 팽이치기, 눈싸움, 연날리기, 썰매 등이었다. 계절을 불문하고, 이 모든 건 여럿이 밖에서 낮에 하는 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밤에 혼자 할 수 있는 건 책 읽는 게 유일했다. 하지만 모두가 책을 읽는 건 아니었다. 책을 읽으라고 잔소리하는 부모도 없었다. 

한마디로 책을 읽는 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였다. 비록 천성이라 할지라도, 요즘은 이를 비웃듯 유혹하는 요소가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자칫 다른 길로 빠지기 쉽다. 반면, 책이라면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은 아이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어릴 때부터 꾸준히 접하다 보면 습관화되는 경향이 많다. 그만큼 환경의 힘은 크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정낭이 세워져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보람”
일을 하다 보면 최선을 다했지만 안 좋은 결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생각지도 않았는데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아마추어로 글을 쓰면서,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늘 하찮은 글이다. 그런데 2018년엔 중앙시조 백일장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월 장원이 되었다. 연말 장원은 어림없었지만, 그래도 얼떨떨했었다. 책방지기 역시 어린이 책 편집일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이언정 씨가 어린이 책 편집일을 하던 당시 춘천에 사는 박경진 그림책 작가님이 계셨다. 박경진 작가의 구름도 쉬어 가는 구름골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야기를 다룬 《구름골 사계절》 시리즈를 출판할 때였다. 이 시리즈에서 이언정 씨는 디자인과 출판하는 일을 맡았었다.

4권의 시리즈로 출판된 작가의 그림책 중 두 번째 책 『꼭, 보고 말 테야! (박경진 글‧그림, 미세기 출판)』에서는 주인공 방실이의 감정과 느낌 등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사랑이 담긴 부드럽고 따뜻한 문체와 그림,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인 구름골의 봄날 이야기는 작가의 어릴 적 경험과 춘천의 시골 생활을 담고 있다. 

이웃집 돼지가 새끼를 낳고, 그날 밤 주인공은 무서운 꿈을 꾸었다. 결국 오줌을 싸고 말았다. 방실이는 그 당시 풍습대로 키를 쓰고 이웃집에서 소금을 받아와야 했다. 

책이 출판되던 2007년 당시에도 10여 년 전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어린 시절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썩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문화관광부에서 우수선정도서로 채택되었다. 호응은 별로 없었지만 가치는 인정받은 것이다. 우수선정도서로 채택되며 상을 받고, 금색 스티커를 제작해서 붙이던 그때의 설렘을 이언정 씨는 잊지 못한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금귤나무를 앞 배경으로 야외에서 바라본 책방. 꽤 넓은 야외는 하얀 세상이다. 길이가 제법인 처마마다 고드름 풍년이다. 입구에 있는 늙은 팽나무와 뒤로 우뚝 선 워싱턴야자가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자녀들이 좋아하는 책과 색깔”
양성차별을 두는 건 결코 아니다. 책방지기의 첫째는 아들이어서 그런지 공상과학이나 판타지를 선호한다. 둘째는 딸인 데다가 어려서인지 전래 속 공주님이나 예쁘게 보이는 그런 부류의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백설공주나 인어공주, 신데렐라보다는 현재 활동하는 작가들의 새로 나온 창작동화들을 더 좋아한다. 책방지기는 회사 다닐 때 작업했던 책들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딸은 그 책들도 계속 읽고 있다. 여전히 회자되는 고전도 많지만, 시대 또한 거스를 수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알게 모르게 이언정 씨가 자식들을 아들딸로 구분하며 키운 건 아닐까? 하지만 이언정 씨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아들을 키울 때도 딸을 키울 때도 아들이면 파란색, 딸이면 핑크색이라는 기준을 두지 않았다. 오직 이언정 씨 본인이 좋아하는 컬러 위주의 옷을 입혔다. 

이언정 씨는 첫째인 아들을 낳고 5년 있다가 둘째를 낳았다. 자연스레 둘째는 오빠가 입던 옷을 물려받았다. 베이지, 카키색 등 주로 중성적인 컬러였다. 첫째는 엄마가 선택해서 입히는 옷 색깔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딸도 네 살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달라졌다. 핑크색을 고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는 단 한 번도 핑크색 옷을 사준 적이 없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딸은 그 색을 고집했다. 이제 엄마와 딸은 아침마다 옷을 두고 실랑이를 벌여야 한다. 

자아나 정체성이라기 이전에 매체 혹은 단체생활에서 받은 영향은 아닐까? 엄마가 보기에도 그런 면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며 친구들이 예쁘다고 선호하는 게 있으면 사달라고 조르기 때문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지만, 책방지기는 욕심부리지 않는다. 돈을 번다기보다 누린다는 목적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진로에 대하여“
이언정 씨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그렇다고 그림 쪽으로 특별하게 뛰어난 건 아니다.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았을 뿐이었다. 성격도 조용한 편이었다. 그러므로 타인의 관심을 끌려거나 앞에 나서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집에서 혼자 그림 그리며 노는 게 다였다. 그래서인지 그림 대회에 출전했던 기억도 없다. 책방지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로란 걸 생각해 보았다.

흔히 진로라 하면 우리는 상급 학교 진학이나 직업 선택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진로는 입학, 졸업, 취업, 결혼, 가정생활, 노후 등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택하고 경험하는 삶의 모든 과정, 즉 사람이 일생 동안 나아가는 길을 뜻한다.

청소년 진로탐색 워크북 『꿈은 이루어진다(남성현 저, 신진리탐구 출판)』에서 보면 처음 진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처음 선택이 이후 삶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삶의 내용과 질까지 좌우하기 때문이다. 

부와 명성을 갖춘 한 외과 의사가 은퇴하게 되었다. 누가 봐도 행복의 조건은 모두 갖췄다. 하지만 은퇴식 내내 외과 의사의 표정은 슬펐다. 왜일까? 

그의 원래 꿈은 무용수였다. 그런데 의사가 되었고, 의사로는 성공했지만 꿈은 이루지 못했다. 성공과 만족은 다른 것이었다.

누가 봐도 외과 의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소위 행복의 조건인 부와 명성을 모두 갖췄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무용수와 외과 의사라는 갈림길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원하는 길이 아니었다. 선택의 결과 그는 꿈을 이루지 못했고, 삶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어느 학교로 진학할 것인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언제 결혼할 것인지 등 수많은 갈림길에서 고민하게 된다. 때로는 경제적이라는 이유로 원치 않은 일을 택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 번의 선택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후 삶의 내용과 질을 좌우한다. 이러한 까닭에 진로를 선택할 땐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로에 미칠 영향 등을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에 있어서 흥미와 적성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흥미와 적성이 일치한다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요소가 겹치지 않을 땐 어느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적성, 특히나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은 본인뿐만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그 일을 해야 하는 게 옳다고 책방지기는 말한다. 살다 보니 본인은 좋아하지만, 타인들이 봤을 때 그 어떤 수준에 못 미치는 경우도 많더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면 그쪽 일을 하는 게 옳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수업하는 예비 중학생 열 명의 아이들은 대부분 흥미를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적성이 있다 해도 흥미가 없으면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흥미가 있으면 점차 전문성을 갖춰나갈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수업하던 중 공교롭게도 흥미와 적성이 겹치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돌아가면서 조언하기로 했다. 그러자 모든 아이가 흥미를 우선하여 고려해보라고 했다. 똑같은 이유였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왼쪽 벽엔 마른 꽃들이 걸려 있고, 오른쪽 벽엔 책방지기의 딸이 네 살 때 책방에 올 때마다 한 장씩 그렸던 그림을 붙여 놓았다. 네 살짜리가 그린 그림치고는 제법 유려하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직업 가치관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도 대부분 아이의 의견은 일치했다. 두 아이를 제외하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능력 발휘라고 했다. 능력을 발휘하다 보면 전문성을 갖추게 되고, 그러면 보수도 많아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와 안정, 사회적 인정을 중요시하던 때와 많이 다른 사고를 엿볼 수 있었다.

“책방지기의 자녀를 위한 독서지도법”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이언정 씨는 대학 진학 후 학부로 들어가며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 후, 세분된 직업을 정하면서 출판사며 그래픽디자인 회사 등 몇 군데 지원서를 넣었다. 그렇게 입사를 한 첫 회사가 교육출판회사였다. 일하는 동안은 즐겁고 재미있었다. 

누구나 독서의 중요성은 알고 있기에, 부모라면 대부분 책을 읽으라고 잔소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책방지기는 자녀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잔소리하지 않는다. 그저 지켜볼 뿐이다. 강요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행동으로 보여준다. 책방지기 본인은 물론 남편도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늘 책 읽는 부모를 보면서 자녀들도 자연스레 읽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다음으로는 언제나 눈에 띌 수 있도록 요소요소에 책을 놓아둔다. 책과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다. 그래도 책방지기는 욕심부리지 않는다. 돈을 번다기보다 누린다는 목적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공감 능력을 키우려면”
예전과 달리 요즘 아이들은 공감 능력이 많이 떨어진다. 책방지기의 첫째는 남자애라 그런지 조금은 무심하고 무딘 것 같단다. 남녀에 따라 다른지 모르지만, 둘째는 오빠보다 훨씬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했다. 아들과 딸의 공감 능력은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물론 책방지기 자녀만을 봤을 때다.

지난여름, 중학생을 대상으로 영화와 만난 독해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수업이 있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장교의 아들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 소년과의 우정을 통해 유대인 학살에 대한 참상을 그리고 있다. 

베를린에 사는 여덟 살 소년 브루노는 군인인 아빠가 진급하면서 폴란드로 이사하게 된다. 이사한 집에서 브루노는 창문을 통해 멀리 있는 농장을 발견했다. 창문 밖 숲속을 탐험하던 브루노는 자신의 방에서 보았던 농장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슈무엘이라는 동갑내기 유대인 소년을 만나 친구가 된다. 강제노동수용소를 농장이라 믿고, 죄수복을 파자마라고 여길 정도로 순진무구한 브루노와 슈무엘의 우정은 끔찍한 결말이었다. 그 농장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의 학대를 받은 아우슈비츠였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에서 바라보는 찻길. 눈이 오는 날 정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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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지기의 남편 카페지기가 커피를 내리고, 책방지기는 설거지를 돕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 한 명과 수업할 때였다. 이해할까 싶으면서도 같이 영화를 봤다. 피로가 누적되었던 나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영화를 보다가 설핏 잠이 들고 말았다. 잠결에 안절부절못하는 아이의 조바심이 나를 깨웠다. 눈을 떠 보니 나치 장교의 아들 브루노가 철조망 밑으로 땅을 파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극도로 긴장감을 더해주는 폭격 소리와 두 소년의 대화에서 아이는 숨이라도 멎을 듯 안절부절못했다. 그만큼 아이의 공감 능력은 뛰어났다. 다시 말하면, 남자아이라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 책방지기는 경험을 많이 하라고 말한다. 경험이 없으면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 때 그 상황을 헤아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책방지기의 아이들만 해도 그렇다. 이야기 속에서 먹을 게 없어 굶는다는 내용이 나오면, “밥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 뭘 걱정하느냐.”는 듯이 말한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했다고 알려진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망언이 떠올랐다. 비록 왜곡된 일화라 할지라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난한 이의 삶을 조금이라도 경험했더라면 프랑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경험은 중요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책방지기의 자녀를 비롯하여 요즘 아이들 대부분 굶어본 경험이 없다. 하지만 어느 음지에는 아직도 굶는 아이들이 많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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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지기가 좋아하는 브랜드 전문 ‘매거진 B’ 시리즈가 진열되어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경험이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공감 능력을 기르기 위해 아이더러 굶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책방지기 이언정 씨는 가능한 여행을 많이 하라고 한다. 여행하면서 가족끼리 시간도 갖고, 해볼 수 있는 일들을 계획하며 경험을 쌓는 것이 최대한 공감 능력을 키우게 된다는 것이다. 여행은 직접적인 책읽기다. 독서에서 얻는 간접 경험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경험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하는 것이다. 

“누리는 보람”
많은 책이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어린이 책 편집에서 연장선으로 하게 된 책방이다. 그러므로 책방지기에겐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게다가 예비 5학년인 아들은 엄마가 책방을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부심이 대단하다. 학교에서는 친구들한테 엄마가 책방을 한다고 자랑하며 몹시도 뿌듯해한다. 그런 아들을 볼 때 책방을 하는 보람은 더 크다. 

서가엔 대부분 책방지기 개인적인 취향이 담긴 책들이 꽂혀 있다. 예술이나 디자인 관련 책들, 그리고 여행 에세이도 많다. 이곳이 여행지인 까닭이다.

두 자녀를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보내면 책방지기는 책방과 카페를 오가며 일한다. 시간에 맞춰 다시 아이들을 데리러 간다. 책방지기의 이런 삶은 워킹맘인지 전업주부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래도 책방지기는 책방 일에 최선을 다한다. 손님이 찾는 책이 없을 땐 대신 주문해주기도 하고, 여행객일 경우에는 다른 서점을 추천하기도 한다. 비록 많은 책이 있는 건 아니어도 책방지기는 행복하다. 돈을 번다기보다 아이와 함께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야자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자라는 카페에서 손님들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야자나무는 카페에서 키운 지 2년 정도 되었고, 4년 정도 된 올리브나무는 작년에 꽃도 열매도 달렸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 윈드스톤은”
커피 향이 그립고 분위기에 취하고 싶을 때, 널따란 야외 정원이 있는 책방 윈드스톤을 찾아가 보세요.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면서 나만의 낭만을 충분히 누리실 수 있을 겁니다. 

찾아가는 길 : 제주시 애월읍 광성로 272
영업시간 : 월~토 09:00~18:00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windstone_jeju/

고봉선은?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식물과 함께 자랐다. 지금은 허름한 고향 시골집에서 꽃과 함께, 독서지도사를 하며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운영위원, 애월문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독립언론 [제주의소리]에서 [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를 통해 격주로 독자들을 만난다. 마을 책방에 깃든 사람과 책 이야기가 소개된다.저서로는 시집 ‘詩를 먹고 자라는 식물원’, 꽃과 함께 사는 이야기 ‘詩가 사는 기행식물원1, 2, 3, 4’, 동화집 ‘지우개’가 있다. 식물원 시리즈로 전자도서관에 식물원을 꾸미는 게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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