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법정의기록] (11) 故김호근씨 여동생 김인근 할머니 재심청구...일가족 7명 몰살

제주4.3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행방불명된 故김호근씨의 여동생 김인근 할머니가 18일 법정에서 재심청구 사건에 대한 심문 절차가 끝나고 4.3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제주4.3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행방불명된 故김호근씨의 여동생 김인근 할머니가 18일 법정에서 재심청구 사건에 대한 심문 절차가 끝나고 4.3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홀로 남겨진 자의 고통은 생각보다 깊었다. 턱이 뭉개지고 손가락이 잘려나간 어머니와 총에 맞아 저수지에 떠오른 아버지, 행적도 없이 사라진 오빠까지 지난 70년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故 김호근씨에 대한 재심사건 심문절차를 18일 진행했다.

재심청구인인 여동생 김인근(87) 할머니는 일가족을 한순간에 지옥으로 몰아넣은 70여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법정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4.3당시 김 할머니는 만 13세였다. 제주시 화복동에서 부모님과 작은아버지, 오빠, 올케, 조카를 합쳐 아홉식구가 오순도순 살았지만 4.3의 광풍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1949년 1월 대한청년단 활동을 하던 오빠는 느닷없이 토벌대에 잡혀갔다. 이후 군인과 경찰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이미 잡혀간 오빠의 행방을 물었다. 지옥의 시작이었다.

군경은 아버지를 먼저 화북국민학교로 끌고 갔다. 곧이어 김 할머니를 포함해 어머니와 작은아버지, 올케, 조카까지 잡아갔다. 당시 조카들은 두 살, 네 살배기에 불과했다.

끌려간 곳은 화북교 4학년 교실이었다. 먼저 잡혀간 아버지는 눈알이 튀어나오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발길질이 이어졌다. 만삭의 올케는 배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곧이어 트럭이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줄줄이 트럭 짐칸에 실려갔지만 김 할머니는 기지를 발휘해 기적처럼 도망쳤다. 인근 초가집으로 몸을 숨겨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트럭 3대 중 첫 차에 여자들을 먼저 태웠는데... 아, 우릴 죽이러 가는 구나 생각했지. 끌려가서 총살당하나, 도망가다 맞아 죽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어.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

홀로 남겨진 집에 어머니가 살아 돌아왔다. 온 몸에 총을 맞아 턱까지 뭉개진 처참한 모습이었다. 손가락도 부러지고 전신에 성한 곳이 없었다. 살아 있는 자체가 기적이었다.

세 번째 트럭에 실려 간 아버지는 속칭 고우니모르 저수지에서 총살당했다. 만삭의 올케와 어린 조카들은 제주대학교 사라캠퍼스 인근 구덩이에서 집단 학살의 피해자가 됐다.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저수지에서 떠오른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지만 정작 화북국민학교로 먼저 끌려갔던 오빠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가족이 풍비박산이 난 1949년 봄.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편지 한통이 왔다. 오빠였다. 어머니는 수건까지 챙겨 형무소로 답신을 보냈지만 이후 답장은 없었다. 편지 한통이 마지막이었다.

"오빠만 있으면 이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지. 기댈 사람이 없으니. 내 삶이 너무 원통했어. 어머니가 그러더라고. 이 억울함을 알려야한다고. 그래야 눈을 감을 수 있다고”

김 할머니는 2009년 김유경 미술심리치료학 박사를 만나 자신이 겪은 4.3의 실상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5년 전에는 ‘제주4.3생존자의 트라우마 그리고 미술치료’라는 책도 펴냈다.

단 한명이라도 4.3의 아픔과 실상을 느끼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오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2019년 4월22일 재심을 청구했다.

김 할머니는 4.3단체의 별도 지원을 받지 않고 가족들과 논의 끝에 홀로 변호인을 선임해 대응하고 있다. 오늘(18일) 3차에 걸친 심문 절차가 마무리되면서 곧 개시 여부가 가려진다.

법원이 재심 개시를 받아들이면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한 오빠의 군법회의는 72년만에 정식 재판으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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