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64) 틈/ 정지윤

막다른 현실을 기어 올라가는 담쟁이. ⓒ 김연미
막다른 현실을 기어 올라가는 담쟁이. ⓒ 김연미

물이 새고 있다 빈틈없이 사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틈에 둥지를 틀고 나는 살고 있었다 틈 사이 봄을 놓쳐버리고 화초들을 말라가게 했다 틈이란 막다른 현실이 되면 더 커지거나 메워진다 또 한방울의 물이 떨어지고 있다

존재의 모든 순간들
발 저리도록 쿵쿵거린다

-정지윤, <틈> 전문-

빈틈없이 살고 싶었다. 나의 영역은 언제나 일정해서 어느 곳에서건 굴곡이 없고, 어디를 둘러봐도 그림자 지는 곳 없기를 바랐다. 원 같은 것. 반짝반짝 타인의 시선으로 빛나기를 바랐다. 아니, 스스로 빛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세계는 결핍과 넘침으로 울퉁불퉁해지기만 했다. 내 손안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도형이 들어 있고, 그마저 시간이 갈수록 ‘물이 새고’, 바람이 들어오고, 내 것일 수 없는 생각들이 들어와 천정에 굵고 작은 균열을 더해 가기만 했다. 나를 잠식해 들어오는 틈. ‘알고 보니 틈에 둥지를 틀고 나는 살고 있었다.’ 보도블럭 갈라진 틈에 뿌리를 내린 한 포기 풀이었던 것이다. 

사는 건 시시각각 벽을 맞닥뜨리는 일. 견고하게 서 있는 벽 앞에서 얼마나 많은 무릎이 제 뜻을 꺾어야 했을까. 가능하면 나도 나를 막아 세우던 그 벽이고 싶던 날들. 그러나 틈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견고한 벽에 손을 대고 건너편으로 건너간 수많은 담쟁이의 발을 받아준 것은 그 벽의 틈. 그 틈으로 빗물이 들어와 목을 축이게 하고, 바람이 불어와 숨을 쉬게 한다. 나의 몸에 너의 발을 딛게 하고, 너의 몸에 내 발을 디딜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존재의 모든 순간’, 존재의 모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틈.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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