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집] 제주4.3행불인 재심 첫 무죄 故김경행 님...아들 김필문 “아버지 이제 죄 없어”

차례상에 무죄 판결문이 오르기까지 꼬박 73년이 걸렸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을 겪은 세 살배기는 어느덧 손자 여럿을 둔 76세 할아버지가 됐다.

김필문(76)씨는 중산간 화북천을 품은 제주시 영평마을에 산다. 공교롭게도 바다와 만나는 화북천 하류 곤을동은 1948년 4.3당시 마을 전체가 불에 타면서 통째로 사라진 곳이다.

불길은 화북천을 거슬러 올라간 중산간 마을까지 잿더미로 만들었다. 당시 김 할아버지는 세 살이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누이 3명을 포함해 7명 대가족의 평범했던 삶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먼저 잡혀갔다. 영문도 몰랐다. 곧이어 군경이 들이 닥치고 마을이 불바다로 변했다. 군경의 대대적인 강경진압인 일명 초토화작전이 마을을 집어삼켰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따라 대나무밭으로 몸을 숨겼다. 마을 안까지 들이닥친 군경은 집 앞에 모아둔 곡식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어머니가 내달려 이를 막아섰다.

제주4.3행방불명인 수형자 재심사건에 무죄 판결을 받은 故김경행씨의 아들 김필문씨가 설 차례상에 아버지 판결문을 올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4.3행방불명인 수형자 재심사건에 무죄 판결을 받은 故김경행씨의 아들 김필문씨가 설 차례상에 아버지 판결문을 올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4.3행방불명인 수형자 재심사건에 무죄 판결을 받은 故김경행씨의 아들 김필문씨(76)는 3000여명으로 추정되는 제주 4.3사건 행불인을 대신해 2019년 6월 법원에 재심 청구를 했다. ⓒ제주의소리
제주4.3행방불명인 수형자 재심사건에 무죄 판결을 받은 故김경행씨의 아들 김필문씨(76)는 3000여명으로 추정되는 제주 4.3사건 행불인을 대신해 2019년 6월 법원에 재심 청구를 했다. ⓒ제주의소리

“제발 곡식만큼은 남겨 달라”는 몸부림에 소총 개머리판이 ‘퍽’하고 날아들었다. 정확히 머리를 가격당한 어머니는 데굴데굴 구르며 길바닥에 그대로 뻗었다. 머리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군인 한 명이 “이 년 죽여버리겠다”며 달려들자, 나머지 한 군인이 “피가 난다. 더럽다”며 만류했다. 군인들이 떠나자 가족들은 천을 모아 지혈에 나섰다. 살아 있는 것조차 기적이었다.

몸뚱이만 남은 가족들은 제주시 남문로터리 옆 오현단으로 몸을 숨겼다. 친척 소유의 헛간을 빌려 잠 잘 공간을 마련했다. 그 난리에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얼마 후 풀려난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기쁨도 잠시, 한 달 만에 군경이 또 들이 닥쳤다. 평생 농사만 짓던 아버지는 빨갱이로 내몰려 제9연대가 주둔한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로 끌려갔다.

이번에는 할머니와 어머니까지 연행되는 신세가 됐다. 할머니는 이틀만에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모진 고초를 겪었다. 전기고문으로 손톱이 거멓게 변하고 젖조차 말라 버렸다.

닷새 만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며 집으로 왔지만 아버지는 소식이 없었다. 얼마 후 관덕정 옆 옛 제주경찰서에서 주정공장으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제주4.3행방불명인 수형자 재심사건에 무죄 판결을 받은 故김경행씨의 아들 김필문씨는 삼대독자다. 아버지를 잃고 몸이 불편한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홀로 밭을 일구며 유년기를 보냈다. ⓒ제주의소리
제주4.3행방불명인 수형자 재심사건에 무죄 판결을 받은 故김경행씨의 아들 김필문씨(76)는 3대 독자다. 아버지를 잃고 몸이 불편한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홀로 밭을 일구며 유년기를 보냈다. ⓒ제주의소리

다시 몇 달 뒤, 대구형무소에서 편지 한통이 날아들었다. 금방 제주로 돌아 갈테니 잘 버티며 지내라는 아버지의 안부인사였다. 한차례 더 편지가 있었지만 이후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아버지가 없으니 집 안에 남자는 나 혼자였어. 할머니랑 어머니, 누이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어. 말도 못하지. 아버지가 행방불명 되고 오현단에서 아라동으로 갔어. 거기 간드락 마을에 가서 억척스럽게 살았지. 먹을 것이 없어서 들나무를 캐다 먹었어. 어떻게든 살려고”

아라동과 영평동을 오가며 농사를 짓다 1958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영평마을 전체가 불에 타고 10년만의 귀향이었다. 당시 나이 만 12세. 학교를 뒤로 하고 농사일에만 매진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밭 일이야. 할머니랑 어머니 모두 몸이 약하니 내가 소를 빌려다 밭을 갈았지. 어머니와 누이가 다른 집 검질을 매주면 밭갈쇠를 빌려와서 하루종일 밭에서 일만 하는 거야”
     
영양 부족으로 체구도 작았다. 멸시를 받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강해졌다. 가정을 꾸리고 더 열심히 일했다. 가정 형편이 나아지면서 영평동 마을 청년회장과 마을회장까지 지냈다.

제주4.3행방불명인 수형자 재심사건에 최근 무죄 판결을 받은 故김경행씨의 아들 김필문씨가 신축년 설 명절을 맞아 제주시 영평동 자택에서 73년 전 4.3당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4.3행방불명인 수형자 재심사건에 최근 무죄 판결을 받은 故김경행씨의 아들 김필문씨가 신축년 설 명절을 맞아 제주시 영평동 자택에서 73년 전 4.3당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1999년 수형인명부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아버지가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사실을 알게 됐다. 2018년에는 故 이중흥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장의 뒤를 이어 회장직을 수행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대구형무소 집단학살의 희생자임을 알게 됐지. 한국전쟁이 터지고 대구 가창산골짜기에서 총살을 당했어. 그 곳을 찾아 아버지 이름을 외치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야.  왈칵”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2019년 6월3일 3000여명의 4.3행불인들을 대신해 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접수했다. 김 할아버지는 행불인 첫 재심 10인의 청구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2020년 11월18일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지면서 올해 1월21일에는 역사적인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1948년 불법적인 군법회의 이후 73년 만에 정식재판을 통해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이다.

“아버지는 군인도 아니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분이야. 그냥 농사꾼이야. 그런 분이 내란죄로 15년을 선고받았어.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이게 한 이였어. 이제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 부디 편하게 눈을 감으시길..., 아버지, 차례상에 판결문을 올립니다. 아버지! 이제 죄 없습니다”

제주4.3행방불명인 수형자 재심사건에 무죄 판결을 받은 故김경행씨의 아들 김필문씨는 제주4.3행불인 유족회장과 제주4.3평화합창단, 도교육청 4.3명예교사 등 4.3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4.3행방불명인 수형자 재심사건에 무죄 판결을 받은 故김경행씨의 아들 김필문씨는 제주4.3행불인 유족회장과 제주4.3평화합창단, 도교육청 4.3명예교사 등 4.3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