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선 시인의 설 멩질 이야기] 함박웃음 터뜨릴 날 기다리며

까치설날 서귀포에는 매화꽃도 귀향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복다복 모여서
새해엔 건강하세요, 덕담들이 오간다
우리 설날 서귀포에는 매화꽃도 절을 한다
새해 첫날 이 아침 시댁 마당 한편에선
툭 터진 하얀 꽃들이 세뱃돈을 건넨다

- 고봉선, 백매화 전문 -

나의 시댁은 서귀포시 효돈동이다. 설날을 일주일 앞두고, 형님과 함께 시댁에 다녀왔다. 올해도 변함없이 마당에선 매화꽃이 피기 시작했다. 설날엔 이들도 와자자, 대가족이 모여 세배를 주거니 받거니 충분할 것 같았다.

결혼하고 시댁에서 처음 설을 맞이했을 때 풍습은 달랐다. 친정에서는 차례를 지낸 후 세배했었다. 그런데 시댁에서는 아침 일찍 차례상을 준비하기 전에 우선 부모님께 세배했다. 이어서 셋집, 작은 집이 모여들어 세배를 주고받았다.

‘세배’ 하면 난 이미 저세상으로 가신 아버지가 먼저 떠오른다. 내가 어릴 땐 음력으로 설을 쇠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양력으로 바뀌었다. 그런가 했는데 다시 음력으로 돌아왔다. 음력으로 설을 쇠던 어린 시절, 아버지께선 3일 동안 세배 다니셨다. 하루는 동네 어른들에게, 이튿날은 친척들이 있는 가문동으로 세배 가셨다. 두루마기를 입고 가문동에 다녀오는 것만도 하루였다. 그 시절은 걸어서 다녔기 때문이다. 셋째 날은 버스를 타고 서귀포며 제주시 등 멀리 있는 친척을 찾아 세배 다니셨다.

세뱃돈은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기쁘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천 원짜리 지폐도 큰돈이었다.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세뱃돈을 받는데도 차별이 있었다. 준비한 돈이 바닥나서 세뱃돈을 주지 못하는 아이가 있으면 어머니는 무척이나 미안해했다. 어떨 땐 우리가 받은 세뱃돈을 빌리기도 했다.

이제 연하장도 청첩장도 온라인, 조의금이며 축의금도 송금 시대다. 이번 설엔 세뱃돈도 송금으로 해야 할지 모른다. 정보화 시대인 탓도 있지만, 코로나19가 삶의 방식을 바꿔놓고 있다.

설날이나 되어서야 만날 수 있는 가족은 어떨까. 고향에서 기다리는 부모도, 모처럼 귀향하는 자녀들도 갈림길에서 망설여지는 때다. 별일 없을 거라며 와야 한다는 부모님도 계시고, 아서라, 오지 못하게 하는 부모도 있다. 어느 편도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다.

6년째 나와 함께 수업하는 여학생이 있다. 중학생인 이 아이는 이번 설이 슬프다고 했다. 이 아이는 스무 살이 되어야 찾을 수 있도록 설정해 놓고 어릴 때부터 세뱃돈을 통장에 넣었다.
현재 이백만 원이 넘는데, 스무 살이 되면 아이는 그 돈을 찾아서 자취하는 게 꿈이다. 4남매의 맏이다 보니 오롯이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이 그리운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아이의 꿈에 가위를 들이댔다. 이번 설엔 세뱃돈이 확 줄어든다. 그래서 슬프다.

손주뻘 아이들은 세배하라면 손가락을 입에 문 체 비비 꼰다. 그러다가 세뱃돈을 주면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세배한다. 그 모습을 보며 한바탕 웃음소리가 번진다. 그러나 이번 설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이다. 하루빨리 코로나19가 잡혀서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마음껏 만나고, 함박웃음 터뜨리며 웃음 한 점 베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빌 뿐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손주뻘 아이들은 세배하라면 손가락을 입에 문 체 비비 꼰다. 그러다가 세뱃돈을 주면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세배한다. 그 모습을 보며 한바탕 웃음소리가 번진다. 그러나 이번 설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이다. 하루빨리 코로나19가 잡혀서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마음껏 만나고, 함박웃음 터뜨리며 웃음 한 점 베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빌 뿐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요즘 아이들은 세뱃돈에 대한 인식이 우리가 자랄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올해 초등학교 3학년 되는 아이가 있다. 3형제 중 막내인 이 아이는 세뱃돈이 줄어든다는 사실에 전혀 연연하지 않았다. 엄마 말에 의하면, 누가 돈을 줘도 집에 오면 아무 데나 둔다. 형들도 마찬가지다. 용돈이 풍족한 편은 아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돈에 대한 욕심이 없다. 세뱃돈을 받으면 저금통에 두었다가 어버이날이나 생신 때 그대로 다 준다고 했다.

엄마는 아들들이 돈을 번다기보다 경제를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6개월 전, 첫째와 둘째 아들이 그동안 모은 이백만 원 남짓의 세뱃돈으로 각각 주식 계좌를 개설해 주었다. 주식을 가진다고 해서 경영에 참여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그만큼의 주인이 된다. 누군가 는 투자하고 누군가는 그 힘을 모아 경영한다. 잘 되면 서로 좋다. 이번에 세뱃돈이 들어오면 아들은 또 그만큼 주식을 살 것이다. 그런데 세뱃돈 받을 확률이 확 줄었으니, 아들이 아쉬워 할 것 같다고 엄마는 말한다.

고향이 서울인 이 가족은 해마다 명절 때면 서울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고 세배한다. 하지만 이번엔 테블릿을 앞에 놓고 화상으로 세배할 예정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세뱃돈보다 친가 근처인 교보문고며 경복궁 둘러보는 기회를 놓치는 게 더 아쉽다. 엄마는 일가족 다섯 명이 오가는 경비로 친가에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사서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자녀들한테는 그만큼의 세뱃돈을 줄 생각이다. 주식을 사게끔 해서 경제공부를 시킬 셈인 것이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이번 설에서 세뱃돈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의외였다. 세뱃돈보다는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 아쉬워했다.

문제는 우리 집이다. 우리는 네 집을 돌아다니면서 차례 지낸다. 다른 집에서 차례를 마치면 큰집인 우리 집으로 모여든다. 아직 미취학인 아이들은 세배하라면 손가락을 입에 문 체 비비꼰다. 그러다가 세뱃돈을 주면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세배한다. 그 모습을 보며 한바탕 웃음소리가 번진다. 그러나 이번 설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대소사를 같이 치르는 친척들이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이다.

세배를 사이에 두고 오가는 빳빳한 지폐, 비록 옛날과 다른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여기엔 정이 흐른다. 어쨌거나 하루빨리 코로나19가 잡혀서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마음껏 만나고, 함박웃음 터뜨리며 웃음 한 점 베물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빌 뿐이다.

고봉선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식물과 함께 자랐다. 지금은 허름한 고향 시골집에서 꽃과 함께, 독서지도사를 하며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운영위원, 애월문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독립언론 [제주의소리]에서 [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를 통해 격주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시집 ‘詩를 먹고 자라는 식물원’, 꽃과 함께 사는 이야기 ‘詩가 사는 기행식물원1, 2, 3, 4’, 동화집 ‘지우개’ 등을 펴냈다. 식물원 시리즈로 전자도서관에 식물원을 꾸미는 게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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