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15) 그 마음 대신 전달해드립니다 / 제주시 조천읍 책방카페 ‘시인의 집’

마을책방은 단순한 기호품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대형서점처럼 책을 어마어마하게 팔아치우는 곳은 더욱 아닙니다. 후미진 도심 골목이나 시골 언저리에서 마을책방을 만난다면 그것은 행운이지요. 마을 초입 팽나무 아래 마을사람들이 모여들듯 책벌레들이 도란도란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입니다. 제주도 마을 곳곳에 작은 책방들이 사람을 살리고, 다시 사람이 마을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을책방의 가치입니다. [제주의소리] 시민기자 고봉선 시인이 바람을 쐬듯 책방마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마을 책방’에서 책방지기의 책 살림 이야기를 시인을 통해 듣습니다. [편집자 글] 

 

노모의 칠순잔치 부조 고맙다며
후배가 사골 세트를 사왔다
도막 난 뼈에서 기름 발라내고
하루 반나절을 내리 고았으나
틉틉한 국물이 우러나지 않아
단골 정육점에 물어보니
물어보나 마나 암소란다
새끼 몇 배 낳아 젖 빨리다보니
몸피는 밭아 야위고 육질은 질겨져
고기 값이 황소 절반밖에 안 되고
뼈도 구멍이 숭숭 뚫려 우러날 게 없단다

그랬구나
평생 장승처럼 눕지도 않고 피붙이 지켜 온 어머니
저렇듯 온전했던 한 생을
나 식빵 속처럼 파먹고 살아온 거였구나
그 불면의 충혈된 동공까지도 나 쪼아 먹고 살았구나
뼛속까지 갉아먹고도 모자라
한 방울 수액까지 짜내 목축이며 살아왔구나
희멀건 국물,
엄마의 뿌연 눈물이었구나

- 손세실리아, 곰국 끓이던 날 전문 -

새로운 책방을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두근거린다. 낯선 이에게 가서 인터뷰를 요청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책방 앞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문을 열었다. 이번엔 중3 교과서에 실린 “곰국 끓이던 날”로 유명한 시인, 손세실리아 님이 운영하는 조천읍 책방카페 “시인의 집”엘 다녀왔다. 

“책은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세요”
“책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선물하세요.” 최근 책방지기 손세실리아 시인이 주문처럼 읊조리는 말이다. 내가 방문하던 날, 책방지기 손세실리아 시인은 “아듀 2020, 웰컴 2021” 이벤트 진행으로 한창 바쁜 시간이었다. 귀한 인연에게 ’저자 친필 사인본‘을 건네는 이 이벤트는 7권이 한 세트이며 랜덤으로 진행한다. 혼란한 요즘, 7이라는 숫자에 깃든 행운을 잠시나마 믿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담겼다. 저자가 직접 서명한 사인본이 99.3%, 사인이 생략된 책은 작고한 경우나 투병 중인 경우다. 부득이 사인 없이 진행되는 소수의 책도 리커버 에디션이나 초판 1쇄가 대부분이다. 특별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면 옮겨 써서 전해주기도 한다. 손글씨가 사라지는 요즘, 손글씨에 깃든 기운을 믿는 시인이다. 추천하는 도서엔 오랜 벗에게 띄우는 기분과 같은 시인의 다정한 응원도 담겼다. “아듀 2020, 웰컴 2021 저자친필사인본” 주문은 당분간 계속된다. 물론 소량의 일반 주문도 가능하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지기 손세실리아 시인이 손님들께 희귀본 및 절판본과 초판 1쇄본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지기 시인은 어느 날 양가 부모님께 선물하고 싶다는 지인의 부탁을 받았다. 그 부탁에 시인은 지인의 양쪽 부모님을 한참이나 떠올렸다. 뵌 적 없으나 그냥 읽히는 인생이 있다. 이 경우가 그러했다. 시인은 두 권의 책 속에 든 변시지·강요백 화백의 일생을 선물하는 자식으로서의 존경과 양가 어르신의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며 엽서에 마음을 담았다. 그리고 사진에 담아 보냈다. 자신의 마음을 보며 ‘고맙다, 눈물이 난다.’라고 했다.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답하지 않았다. 이심전심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두 아이에게 시집을 보내 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시인은 두 아이가 하는 일과 나이, 취미와 관심을 여쭈었다. 이곳을 다녀가신 두 분의 뒷모습도 사진에서 자주 들여다보았다. 엄마, 아빠의 마음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헤아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책을 골랐고, 강요배 그림엽서 세트와 그림동화 한 권까지 빨간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부탁했던 K 선생님의 말씀을 옮겨서 사진으로 보내드렸다. 정성스레 모인 마음을 보며 고맙단 인사와 함께 눈물이 난다고 하셨다. 

이번 이벤트는 한 해 동안 애쓴 본인에게 주는 선물이 가장 많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반자로서 서로의 처지를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이번 이벤트에서 시인은 여느 때와 달리 엽서를 쓰며 차분하게 책을, 아니 마음을 꾸렸다. 

내가 찾아간 날은 고등학생들을 위해서 마음을 담는 중이었다. 책방을 시작한 지도 6년, 이제 특정한 대상을 위한, 특정한 대상들에게, 선물처럼, 정말 시인이 아니면 안 되는 기획을 할 수 있는 책방이 됐다. 6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결과이다. 이러한 활동을 페이스북 등 SNS에 꾸준히 올리며 신뢰도 구축되었다. 마음을 전하는 일, 시인은 이 엄청난 일을 연일 수행하는 중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시인의 책상이다. 책상 위 대왕유카의 뾰족한 끝이 마치 글을 쓰는 것 같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신세 진 분의 자녀가 고등학생이어요. 그 친구에게 선물을 보내고 싶어요.” 외에도 큰엄마, 고모, 혹은 이모가 조카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책을 선물로 보내고 싶다는 분들이 계시다. 책방지기 시인은 이런 분들의 마음을 오롯이 책에 담아야 한다. 어떻게 담을까, 책만 보낸다는 건 부족했다. 책방지기 시인은 당신이 모르는 고등학생 아이들을 생각했다. 가장 큰 건 중3 교과서에 실린 시 “곰국 끓이던 날”을 손글씨로 써서 주는 것이었다. 시인이라는 사실보다는, ‘어떤 어른이 나를 위해 이렇게 손으로 글씨를 써서 선물을 줬구나.’ 하는 큰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약속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손세실리아 시인은 온종일 손글씨로 엽서에 시를 썼다. 부탁하는 이의 마음을 담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책에는 저자의 사인이 들어있다. 그런 만큼 힘들고 오래 걸린다. 그래도 마음을 담는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 기획한 책은 고등학생들이 꼭 읽어야 할 일곱 명 시인의 시집 다섯 권과 우화 두 권이다. 오랜만에 집에 온 딸에게 퍼 주는 친정어머니처럼 줘도 줘도 모자랐다. 책방지기 시인은 다이어리와 시, 귤칩, 양말도 봉투에 넣었다. 마음을 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자신의 마음도 알 수 없는 게 삶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이라니, 엄청난 일임은 분명하다. 

주문받은 지 벌써 2주다. 사인본을 기다리다 보니 늦어졌다. 시인의 마음이 다급하다. 책방에서는 책을 팔아야 한다. 그런데 사인본을 산다고 우르르 몰려들면 감당할 수 없다. 순정한 마음으로 이 일을 오래 하고 싶은데, 팔아야 또 쓰고 싶은 생각도 들고 많은 책을 살 수 있을 텐데……. 이럴 때 시인은 가끔, ‘나는 왜 이 일을 하지?’라는 생각도 든다. 나 같은 방문객이 반가웠을 리 없다. 은근히 짜증도 났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나를 내쫓지 않았다. 고마울 뿐이었다. 

시인 옆엔 아직 뜯지도 못한 책이 쌓여 있었다. 날마다 배달되는 책들이다. 이렇게 배달된 책을 250권 정도 읽었을 때, 혼자 읽기엔 아까운 책이 있다. 얼핏, 우리는 베스트셀러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출판사에서도 왜 베스트셀러를 넣지 않느냐고 한다. 베스트셀러는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다. 그보다 책방지기 시인에겐 베스트셀러와 무관하게 좋은 책이 너무 많다. 시인이 뽑은 이 책들은 누군가가 읽어줬으면 좋겠다 싶은, 이름을 걸고 추천하는 책들이다. 이런 것들은 한 마디로 전하기가 힘들다. 그냥 마음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낯선 이가 불쑥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할 때, 마음을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미안했다. 정말 미안했다. 그래도 난 시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통유리가 끼워진 창 너머 썰물 풍경 속엔 소용돌이치는 이야기들이 있다. 눈물이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것처럼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뛴다. 앉아만 있어도 가슴에 스며드는 이야기들, 내가 바다가 되고 바다는 내가 된다. 평화로운 오리들이 자맥질할 땐 물갈퀴 달린 발가락이 바동거린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인생이 바뀌다”
2010년 10월, 손세실리아 시인은 조천의 바닷가에서 100년이나 된, 그야말로 붕괴 직전의 집을 만났다. 그 후 인생이 바뀌었다. 갑자기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해본 적도 없는 책방카페를 하며 살다 보니 시인에게는 이 집이 또 다른 섬이다. 모든 것을 다 두고 이곳에서 그 어떤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책방지기 시인은 뭔가를 공유하며 이 공간에 대한 갚음의 갚음을 갚고 있다. 이 집은 개인을 나타내기보다 이곳에 걸음 하는 모든 이, 소중한 인연들을 위한, 선물 같은 코너들이다. 벽에 걸린 그림도 마찬가지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당대 중요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처럼 오래됐고 화려하지도 않은 카페를 찾아왔는데 “어머, 내가 여기 와서 이렇게 좋은 작품을 감상도 할 수 있구나.” 하는 만족을 주고 싶다. 세련되게 뭘 붙여놓지 않았는데 알고 보면 좋은 작품인, 시인은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여기 오는 분들에게 선물처럼 다 내주고 싶다. 그런데 불현듯 왔다가 사진 한 장 찍고 떠나가는, 그리고 이 공간은 기억에서 영영 지워버리는 이들. 시인은 인터뷰를 요청하는 내게도 무척 조심스럽다고 했다. 10년 차인데도 이런 것들이 낯설고 조심스럽다는 시인, 왠지 미안해지면서 죄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작품이다. 데이비드 걸스타인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팝 아트 마술가로 특히 금속의 미술가로 유명하다. 일상 속 소재를 드로잉한 철판을 레이저로 자른 후 자동차 도색 기법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은 장소에서 전시회가 열릴 만큼 완성도가 높은 작가이다(좌). 정치적 탄압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국의 70~80년대에 선도적으로 민중 운동을 이끌었던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임옥상 화백의 작품이다(우). 시인이 소장한 작품을 여기에 전시하는 이유는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좋은 작품 감상이라는 3박자와 더불어 바다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감상할 기회도 주고, 원하는 분께는 양도하여 책 구매에 충당한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시인의 집은 95%가 시집이다. 이렇게 시집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시집을 안 읽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시를 읽어줬으면 하는 책방지기 시인의 바람이 크다. 그래서 손세실리아 님은 시인의 집에서 가장 좋은 자리, 메인에 시집을 둔다. 요즘 쏟아지는 많은 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고, 가르치려 들고, 골치 아프고, 난해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래서 독자들이 더 시를 안 읽는지도 모른다. 시집이 안 팔리는 이유, 시를 쓰는 사람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진열된 시집은 다르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이름을 걸고 추천하는 좋은 책들이다. 물론 시인의 주관이지만, 지금 이곳에 진열된 시집들보다 완판된 시집의 가짓수는 몇 배다. 수백 종의 시집들이 여기서 완판되고 진행되었다. 

시인은 모든 책을 총괄해도 120점을 넘기지 않으려고 한다. 구매하는 책도 현금으로 거래하고 반품시키지 않는다. 많은 책이 쌓여 있는 이유다. 시인은 카페 수익과 저작료, 원고료 및 강연료까지 책을 구매하는 데 쏟아붓는다. 가끔은 소장품을 양도해서 책값을 충당하기도 한다.

”곰국 끓이던 날“
무남독녀인 시인은 그다지 밝은 환경 속에서 자라지 못했다. 불우한 데다 결손가정이었으며 엄마와의 갈등 또한 심했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내고 시인이 되었더니 프로필 맨 앞에 붙는 게 ’1963년 전북 정읍 출생‘이었다. 시인은 자신이 태어난 곳 정읍을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을 빚어낸 것은 정읍이라는 땅과 어머니였다. 시가 아니었으면 갈등의 폭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내면으로 깊어지며 폐허화 됐을 것이다. 시를 쓰면서, 비로소 엄마를 한 인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의 차원이 아니라 한 인간, ’나‘라는 한 인간이 엄마라는 인간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카페 “시인의 집”엔 95%가 시집이다. 한 손님이 진열된 서가를 들여다보며 시집을 고르고 있다. 사진은 시인의 집에서 제공해주셨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손세실리아 시인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은 사람이다. 밝고 씩씩하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축복받은 삶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게도 들려줄 이야기가 있었다. “곰국 끓이던 날”이라는 이 시 속에는 ‘엄마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시인처럼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이런 삶이야.’라는 게 다 들었다.

이 시를 쓸 때 시인은 독립된 개체로서 또 엄마라는 독립된 개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삶이 나왔다. 그렇지만 이후로부터 세월이 지나면서 작가들에게 ‘어머니는 곧 자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리할 수 없는 자아, 시인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모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 또한 자아가 투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거기서 희로애락을 건져 올렸다. 좋은 문학작품엔 유독 어머니의 이야기가 많은 이유다. 

“곰국 끓이던 날”이 어려운 시는 아니다. 이 시를 읽으며 ‘아, 우리 엄마가 이런 사람이구나. 나한테 다 퍼 주는 사람이었구나.’에서 고맙기도 하다. 반면 ‘나도 여성인데, 아이를 낳으면 이렇게 다 쏟아붓고 나는 없어지는 거 아닌가?’라는 고민도 생긴다. 한 여학생의 경우가 그랬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시라는 건 단답형으로 강요하고 주입하고 하는 게 아니다. 행간 속에는 막힌 숨을 내뱉을 수 있는 숨통이나 길이 있다. 충분히 다른 쪽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너무 옥죄는 듯, ‘자식을 낳으면 나도 이렇게 희생만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속단이다. 시인은 그걸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영특하다. 자기 정체성도 뚜렷하며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충분히 이 시가 전하는 메시지를 알아차릴 것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임옥상 님의 “전태일 동상(좌)”은 2016년 김운성 작가의 원작을 4분의 1로 축소하여 청동으로 만든 에디션 첫 번째 작품이다. 김운성·김서경 님의 “평화의 소녀상(우)”은 이 공간을 아끼는 연기자 안석환 님의 마음이다. 우연한 기회에 전시회장을 방문했던 안석환 님은 개인이 소장하면 보관에 그치고 만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많은 이가 찾는 이 공간을 떠올렸고, 기별을 전해오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소녀상을 가까이에서 보며 사과조차 받아내지 못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상기하고 아픔에 동참, 공감하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시인의 어린 시절” 
시인의 어린 시절은 당당하고 명랑했다. 게다가 대외적이며 앞에 설 땐 진행도 하고 회장도 맡았다. 어디 그뿐인가, 학교 임원도 하고 합창단 지휘도 했다. 하지만 돌아서면 매 순간이 주저앉고 싶었던 성장기를 거쳐 왔다. 자존심 때문에 누군가에게 ‘나 힘들어. 우리 집은 이래.’라는 이야기도 못 했다. 지금 역시 힘든 일이 있어도 잘 표출하지 않는다. 언제나 지나고 나서야 이야기한다. 친구들도 어른이 될 때까지 시인에게 그런 아픔이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

시인은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읽는 게 좋았다. 그리고 늘 뭔가를 썼다. 유일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게 글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일본어 시간이었다. 수업 시간에 시인은 늘 갖고 다니는 두툼한 양장본 공책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선생님은 공책을 압수했다. 그리고 졸업할 때 찾으러 오라고 했다. 보름 정도 지나고, 일본어 선생님은 손세실리아 시인을 교무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꿈이 소설가냐고 물었다. 손세실리아 시인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작가가 될 것 같다면서 “이렇게 소중한 걸 압수했는데 왜 찾으러 오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일본어 수업 시간에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다. 자신의 과목만 중요하게 여기는 선생님도 많을 터인데, 이런 선생님이 계시는 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끼를 살리며 즐겁게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여행 중 고요롭게 독서 중인 방문객. 책을 사이에 두고 방문객과 썰물은 지금 밀어를 주고받는 중. 사진은 시인의 집에서 제공해 주셨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시인의 집 정면. 겨울이라 조금 썰렁하다. 막 피어나는 제주수선화만이 향을 뿜고 있다. 이제 곧 처마 밑에서 수국의 새싹이 돋아나고, 여름 장마를 알리며 만발하게 필 것이다. 그땐 시인의 집을 드나드는 모든 이에게 서정시 한 편씩 선물할 것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특이한 등단”
손세실리아 시인은 신춘문예 출신도 아니고, 등단 과정이 특이한 케이스다. 손세실리아 시인은 지역 문예지 해남에서 발간해 낸 <땅끝문학>, 포항의 <작가정신>, 부산에서 만들어내는 계간 <작가와 사회> 등등 여러 곳에 작품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 시를 눈여겨본 편집자들, 이를테면 서울에서 만들어내는 계간지 등의 매체에서 거꾸로 청탁이 왔다. 그렇게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게 되면서 손세실리아 시인은 등단 절차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렇게 첫 단추를 끼워준 게 대구의 <사람의 문학>이라는 계간지였다. 시집으로「기차를 놓치다」와 「꿈결에 시를 베다」가 있고, 산문집 「그대라는 문장」을 펴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걸개그림으로 유명한 목수 출신의 화가 최병수 님의 얼굴 솟대다. 시인의 집에는 이 외에도 한글 솟대 등 여러 솟대가 있다.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저항 시인 조태일의 마지막 제자 손세실리아“
1990년대, 조태일 선생님은 광주 대학교에 계셨다. 그때 손세실리아 시인은 사회교육원 과정에 등록하여 조태일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만남은 길지 못했다. 거의 한 학기가 끝나고 가을, 지병으로 조태일 선생님은 돌아가셨다. 당신의 마지막 생전 모습을 지켜보는 손세실리아 시인에게 조태일 선생님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양성우는 어떤 시인이고, 선생님과는 어떤 관계이며, 어떤 자취를 남겼고, 어떤 시를 썼고, 고은 시인은……. 나희덕 시인은……. 곽재구는……. 이런 식으로 그야말로 많은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필요한 책이 있으면 언제든 당신의 서재에서 꺼내 보는 것도 허락하셨다. 물론 ‘반드시 되돌려 놔라.’ 하는 조건이 있었다. 

손세실리아 시인의 자산 중에서 가장 값진 건 스승으로부터 받은 저서이다. 조태일 선생님은 모든 저서에 서명하고 한 권씩, 한 권씩 손세실리아란 제자에게 주셨다. 만약 조태일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글이 짧으면 그게 곧 시인 줄 알았을 것이다. 역사의식도 현실 의식도 그 어떤 의식조차도 없이 말이다. 오늘의 손세실리아 시인을 있게 한 건 조태일 선생님이셨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시인의 집을 찾은 간디학교 재학생과 교직원. 사진은 시인의 집에서 제공해주셨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손세실리아 시인이 보는 조태일 스승은 시가 훌륭하고 큰 시인이다. 그런데 스승을 생각하면 손세실리아 시인은 선생님의 양복 소맷귀가 먼저 떠오른다. 손세실리아 제자가 보는 선생님의 양복 소맷귀는 언제나 너덜너덜해 있었다. 그리고 바지춤엔 항상 전대를 차고 다니셨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학교 정문을 나설 때까지 일일이 차를 세우고 밥 먹었느냐고 물었다. 만약에 밥을 안 먹었다고 하면 당신의 차에 태웠다. 그리고는 광주에서 가까운, 화순 가는 길 국밥집으로 데려가서 배를 채워 주셨다. 또 강의가 끝나면 호프집으로 갔다. 어딜 가든 선생님의 전대에서는 끊임없이 술값, 밥값, 차비 등이 나왔다. 그때 손세실리아 제자는 그게 시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고, 시를 쓰게 된 이후에야 ‘아, 선생님은 저 전대에서 끊임없이 시를 끄집어내며 우리에게 건네줬구나.”를 알게 되었다. 마흔이 되어서야 시단에 나온 시인에게 아직도 조태일 선생님은 큰 품을 가진 선생님이고 어버이시다. 그처럼 큰 품을 지녔기에 두고두고 회자할 그런 시를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처럼 마를 줄 모르는 기운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제자들에게 흐르며 전달되는 건 아닐까. 선생님은 가셨어도 제자들의 시심에는 선생님의 전대에서 흘러나오던 그 씨앗들이 싹트고 있는 게 아닐까. 나에게도 이런 스승이 있었던가. 스승 생각에 손세실리아 시인의 눈가가 붉어진다. 지금 나와 함께 수업하는 아이들에게라도 그런 스승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오는 만남이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시인의 집을 나와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널따란 주차장이 있다. 그곳에 멀구슬나무 한 그루가 주차관리원인 듯 서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카페 시인의 집은”
차를 마시며 책을 펼치면 내가 바로 시가 되는 풍경 속의 풍경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곳, 2021년 새해엔 카페·저자사인본서점·갤러리 〈시인의 집〉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 문학 대담 및 필요에 따라 낭독회, 북 토크, 시 낭독회며 콘서트도 열립니다. 지금은 시인이 차마 혼자 읽기 아까운 책 가운데 저자사인본 “모독(박완서 글, 민병일 사진)”, “악의 평범성(이산하 시집)”이 블로그에 예약 공지 중입니다. 블로그 공지에 답글로 예약이라 남겨주시고, 메시지에 주소, 전화번호, 이름을 남겨주시면 됩니다. 

찾아가는 길 : 제주시 조천읍 조천3길 27
영업시간 : 영업시간이나 정기휴일을 따로 정하지 않고 운영합니다. 방문 시 반드시 전화로 영업 확인 바랍니다.
블로그 : blog.naver.com/soncecil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cecilia.son.1 

고봉선은?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식물과 함께 자랐다. 지금은 허름한 고향 시골집에서 꽃과 함께, 독서지도사를 하며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운영위원, 애월문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독립언론 [제주의소리]에서 [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를 통해 격주로 독자들을 만난다. 마을 책방에 깃든 사람과 책 이야기가 소개된다.저서로는 시집 ‘詩를 먹고 자라는 식물원’, 꽃과 함께 사는 이야기 ‘詩가 사는 기행식물원1, 2, 3, 4’, 동화집 ‘지우개’가 있다. 식물원 시리즈로 전자도서관에 식물원을 꾸미는 게 소망이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