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여론조사로 민심 확인…제주 미래 고민할 차례

“우리 사회는 서로 다른 가치를 옹호하며 입장을 달리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갈등을 보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갈등을 사회발전의 추진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2017년 10월20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결과를 발표한 김지형 위원장의 서설(序說)은 예상외로 길었다. ‘어쨌든’ 가부를 논해야 하는 상황, 고심의 흔적이 엿보였다. 그만큼 당시 핵 발전소 건설재개와 건설중단을 요구하는 양쪽의 입장은 팽팽했다. 

처음엔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471명의 시민참여단을 통한 공론화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 차이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공사 재개 권고로 결론이 남으로써, 김 위원장의 말마따나 하나하나가 절실하고 절절한 두 입장과 가치가 서로 조율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정부의 최종 정책 결정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국책사업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공론절차를 통해 해결한 모범사례로 꼽힐만 했다.

우리 제주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2018년 6·13지방선거를 앞두고 진행된 숙의형 공론조사가 그것이다. 조사 대상은 국내 최초의 투자개방형 외국병원(외국인 영리병원)으로 기록될 뻔했던 녹지국제병원 개설 여부. 영리병원은 제주 사회에서 10년 넘게 찬반 논란이 이어져온 갈등 사안이었다. 결과는 개설 불허 권고. 

그러나 원희룡 지사는 공론조사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했다. 공론조사에서 반대가 월등히 높게 나타났는데도 듣지 않았다. 대신 조건부 개설 허가 카드를 빼들었다. 여러차례 최대한 권고를 존중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약속을 깼다. 민감한 현안을 놓고 한참 뜸을 들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론조사 요구에 응한 뒤 선거가 끝나자 권고를 물리친 모양새가 됐다. 공론조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도민들께는 정말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비난은 달게 받겠고,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 그해 12월, 원 지사는 권고를 수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했지만, 선거에서 승리한 마당에 무슨 말이든 못하랴. 개인적으로 허망했다. 이제야 비로소 민심을 제대로 받드는 도백이 출현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2년여 전의 아픈 기억을 더듬는 것은, 갈등을 사회발전의 추진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또 오지 않았나 싶어서다. 제2공항의 운명을 가를 도민 여론조사 얘기다. 

[그래픽디자인=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그래픽디자인=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2015년 11월, 제2공항 예정지 발표 이후 5년여가 흘렀다. 설사 국책사업이라 해도 제주의 미래는 제주도민이 결정해야 한다는, 이른바 자기결정권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지금은 여건도 나쁘지 않다. 앵무새처럼 “제2공항은 국책사업” “추진주체는 국토부”라는 말만 되뇌며 영혼없이 끌려다녔던 제주도가 공론조사에 응한 것부터가 변화라면 변화다. 국토부 또한 제주도에서 합리적, 객관적 절차에 따른 도민 의견수렴 결과를 제출하면 정책 결정에 충실히 반영하겠다는 입장이다. 2019년 2월, 입지선정 타당성 재조사 검토위원회 활동기간을 2개월 연장할 때도 당·정 합의사항에 같은 내용이 들어갔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여론조사는 이뤄졌고 결과도 나왔다.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 민심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1년여 전 문재인 대통령도 약속했다. “정부는 제주도민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 

5년은 긴 시간이다. 그동안 싸울 만큼 싸웠다. 그렇다고 헛되이 보낸 시간은 아니었다. 찬반 양쪽 간에 반목과 불신이 깊어졌지만, 앞으로 제주를 어떻게 가꿔가야 하는지 도민사회의 고민도 한층 깊어졌다. 한편으로 과거를 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훗날 옥동자를 잉태하기 위한 워밍업의 시간이었다. 어떠한 갈등이든 경우에 따라선 제주 발전의 에너지원으로 쓰일 수 있음을 깨닫는 계기도 되었다. 

그간 뱉은 말도 있고, 국토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관측이 어렵지 않다. 상식을 따를 것으로 본다. 전달자 역할에 그칠 제주도 역시 변수가 되지 못한다. 정작 지금부터는 제주도민의 시간이다. 제2공항 문제가 아니다. 10년, 30년, 100년 후 제주의 참모습을 구상하는 치열한 설계의 시간. <논설주간 /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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