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90) 클라이브 해밀턴, 정서진 역, ‘인류세’, 이상북스, 2018.

출처=알라딘.
클라이브 해밀턴, 정서진 역, ‘인류세’, 이상북스, 2018. 출처=알라딘.

풍경 하나.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FFF) 운동으로 유명하다. 고등학생이었던 툰베리는 의회 앞에서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란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이 운동이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지금은 전세계로 번졌다. FFF에서 최근 흥미로운 영상을 하나 업로드했다.

이 영상은 화성 이주에 관한 것이다. 화성에는 전쟁도 없고, 오염도 없고, 심지어 지긋지긋한 팬데믹도 없다. 하지만 화성에는 단 1%만이 이주할 수 있다. 99%의 사람들은 여전히 지구에 남아 있어야 한다. 영상의 제목은 그래서 ‘1%’이다. 반전을 품고 있는 이 영상은 우리 시대의 위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식을 꼬집는다. 

 

풍경 둘.

오늘날 혁신 기술 기업가의 대표 격인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영화 <아이언맨>의 실제 모델로도 유명하다. 그는 에디슨에 이어 오늘날 미국의 개척 정신과 창조 정신을 대변한다. 일론 머스크는 스페이스 X를 이끌고 있는데,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기업의 목표는 인간의 화성 이주이다. 

머스크의 꿈은, 그가 즐겨 읽었던 과학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진심을 다해 지구의 위기를 걱정하면서 전기차를 보급하거나 화성으로 이주를 추진한다. 어느 토론에서, 알리바바 그룹을 이끌고 있는 마윈이 화성 이주 계획보다는 지구를 지속 가능하도록 발전시키는 게 좋다고 하자, 머스크는 전세계 자원의 1%만이라도 우주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류세, 위대한 인류의 시대 혹은 지구 행성의 마지막 페이지

미래를 위한 금요일의 영상이 머스크의 화성 이주 계획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머스크의 기술 혁신에 대한 청사진에 환호하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우주 개발과 화성 이주 계획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1%’라는 간결하지만 호소력 있는 영상의 제목처럼, 극소수의 인원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구에 남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기후 변화로 인한 지구의 종말에 대비해 우리가 화성이나 지구 바깥으로의 대탈출을 대안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아이디어에 대해서 반대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이 영상이 주는 반성은, 우리가 화성 이주와 같은 기술과 공학에 의한 해결이 가능하다고 낙관하는 한 지구 행성은 더 뜨거워지고 더 망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최근, 기후 변화나 기후 위기와 더불어 자주 보게 되는 개념이 ‘인류세’(Anthropocene)이다. 이 낯선 지질학 용어는 인간이 지층에 지울 수 없는, 두드러진 흔적을 새겨 넣게 된 시기를 지칭한다. 과연 어떤 흔적인가?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지구과학자들이 홀로세가 끝나고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믿는 주된 이유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급격한 증가와 그로 인해 지구 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연쇄적인 영향 때문이다. 해양 산성화, 생물종의 멸종, 질소순환의 혼란 등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힘들이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16~17쪽)

노벨상을 수상한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인류세라는 말을 가장 널리 퍼뜨렸다. 인류세란 용어는 그 시작은 과학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단지 과학자가 자연을 객관적으로 관찰한 결과로 그치지 않는다. 첫째, 인류가 지구 행성 전체의 시스템을 교란시킬 정도로 강력해진 힘을 지니게 된 것이다. 저자는 ‘지구 시스템’(Earth System)은 지형, 환경이나 생태계라고 부른 것을 망라하지만, 그것을 초월하여 과거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국지적인 시선이 아니라 행성 전체를 돌아봐야 할 때이다. 둘째, 그 힘의 결과는 명백한데, 다름 아닌 우리, 지구 생명체의 멸망이다. 그렇다면, 첫째 사실, 즉 인류의 힘이 지구와 자연을 압도했다는 것에 우리는 그저 환호해야 할까? 그리고 둘째 과학자들의 경고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라는 과학적 진단, 혹은 담론과 운동을 비판적으로 논한다. 그는 기후 위기와 인류세 담론을 부정하는 이들도 비판하지만, 인류세 담론의 한복판에 있는 동료 학자들도 (더 거세게) 비판한다. 기후 위기를 허구로 간주하는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지만, 예를 들어 트럼프 류의) 정치적 보수주의자보다는 기후 위기와 인류세 담론에 가세하고 있는 그의 동료들(예를 들면, 도나 해러웨이처럼 자연과 문화 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포스트-휴머니스트)이 더 자주 도마 위에 올라온다. 

한편, 에코모더니스트(ecomodernist)는 그가 주로 겨누고 있는 과녘 중의 하나다. 이들은 인류세는 “자연을 개조하고 제어하는 인류의 능력”(48쪽)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용어를 처음 들었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의 프롤로그가 떠올랐다. 지구 온난화의 방지책으로 사람들은 새롭게 만든 가스 CW-7을 대기권에 살포한다. 그 부작용으로 새로운 빙하기가 시작된다.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윌포드가 만든 호화 크루즈 열차뿐이다. 물론 이 열차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은 제한적이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CW-7을 뿌리며 희망에 부풀어 있던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이다. 생태계 교란이 아니라 지구 시스템 전체의 기능에 문제가 생길 정도인데, 언 발에 오줌을 누며 낙관하는 자들. 그레타 툰베리의 말로 돌아가면, “우리 집이 불타고 있다.” 집이 불타고 있는데, 우리는 저 큰 불을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냈다고 환호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미래를 낙관할 것인가. 

클라이브 해밀턴의 주장처럼, 인류세는 진보 서사가 아니라 실패의 서사로서 불리한 점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실패의 서사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가 최악의 상황만은 모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구와 우리 자신의 종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 노대원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부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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