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묻지 않고 제주와 오키나와를 생각할 수 있는가 
미국을 묻지 않고 제주와 오키나와를 생각할 수 있는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44) 김동현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진상과 표류에 의해 촉발된 만남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제주와 오키나와(류큐)의 교류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475년(세조3년)에 풍랑을 만나 류큐에 표류한 제주 사람을 조선으로 송환했다는 기록부터 1891년(고종 28년) 제주에 표류한 오키나와(류큐)인을 돌려보내도록 했다는 기록까지 제주와 오키나와의 조우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류큐 어선이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에 표류했다거나, 류큐의 사신이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오키나와는 제주, 나아가 조선의 시야에서 충분히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었다. 수평선 너머 우리와 다른 이국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지리적 시선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진상(進上)’과 ‘표류(漂流)’라는 키워드로 봉건시대에 이뤄졌던 두 지역의 교류를 정의할 수있다면 현대사에서 오키나와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일본 영토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던 오키나와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오키나와는 일본 제국의 무차별적 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였다. 일본 제국의 폭력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류큐대학의 오세종 교수가 쓴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는 1945년 오키나와 전쟁 전후에 오키나와에 있었던 조선인들의 삶이 잘 드러나 있다. 거기에는 일본인-오키나와인-조선인으로 이어지는 식민주의적 차별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오랫동안 오키나와 조선인 ‘위안부’를 연구했던 홍윤신(洪允伸)과 오키나와인들의 노력 끝에 오키나와에 130여개의 ‘위안소’가 설치됐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미야코 섬을 비롯한 오키나와 곳곳에 세워진 위령비는 오키나와로 끌려갔던 그들을 위한 작은 위로였다.

미야코 섬의 아리랑비. 사진=김동현.

1945년 8월 ‘해방’과 ‘점령’의 교차가 조선의 비극적인 분단으로 이어졌다면 오키나와는 미국의 국익을 위한 ‘점령된 땅’이자, 일본 본토의 평화를 위한 ‘희생의 땅’이 되었다. 이승만, 박정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등 한국과 일본의 정치인들은 전후 냉전 체제라는 거울에 비춰진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제주를 ‘빨갱이 섬’으로 몰아세웠던 한국의 상황이나,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오키나와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일본 본토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한사회에서 ‘빨갱이 섬멸’이 ‘개발과 재건’으로 바뀌면서 국가의 지배와 폭력은 더욱 교묘해졌다. 오키나와 역시 마찬가지였다. 1972년 ‘일본 복귀’ 이후 ‘오키나와 부흥정책’은 군사기지화 된 오키나와의 모순을 숨기기 위한 본토의 전략이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가. 국가의 지배 전략은 ‘꼼꼼’하고 ‘치밀’했다. 1963년 자유항 설정 구상으로 시작된 제주개발 정책이 1991년 제주개발특별법, 2000년대 제주특별법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나 오키나와 미군기지 등의 문제는 국가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지역이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제주와 오키나와를 관통하는 힘, 미국

해방 이후 남한 사회에서 오키나와가 거론되는 순간을 살펴보면 두 지역 간의 만남이 식민주의와 냉전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 언론에서 오키나와를 언급하는 사례를 살펴보면 미군 기지 문제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972년 오키나와 ‘일본 복귀’를 전후로 해서는 미군 기지 이전이 중요한 이슈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미군 기지 이전 문제와 제주가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1968년 6월 동아일보에는 <오키나와 미기지 제주도 이전 논의>라는 기사가 실리고(사진=1968년 6월 18일 동아일보),  제주도가 발행하는 <제주도지>에 ‘오키나와 특집’이 게재되기도 했다.

'경향신문' 1969년 6월 6일자 1면. ‘제주에 해공군기지-한미 국방회담서 의견 모은 듯’이란 제목이 보인다. 사진=김동현.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는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밝혔고, 제주에 미 공군기지와 해군기지까지 건설할 수 있다는 한미간 합의가 이뤄졌다는 보도도 나왔다.

국회에서도 오키나와 반환 문제가 거론되면서 미군기지 유치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국방부 차관을 지냈던 박병배 의원(신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국가 안보를 위해 오키나와 미군 기지를 제주도에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당시 제주 출신 국회의원은 제주도민들이 환영대회를 열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당시 신문 보도 내용을 소개한다. ‘3국 고민 한 목 해결된다고’, 《경향신문》, 1968.6.18.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제주도 이동 문제가 한일간에 논의되었다는 보도는 정가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듯, 지난 번 국회에서 안보 문제에 관한 대정부 질문에서 오키나와 미군기지유치론을 제창한 바 있는 신민당의 박병배 의원은 18일 상오 “내가 바로 그 창안자”라고…제주도 출신의 양정규 의원은 “제주도민 전원이 궐기해서 환영대회라도 열겠다”고 가슴 부푼 반응을 보였고...”)

이러한 논의들은 국가 안보라는 명분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힘의 논리가 깔려 있다. 미군기지 반환문제가 대두되면서 제주가 언급되는 과정은 오키나와가 미군 점령 이후 분리 통치되었던 5년 동안 소위 사석(捨石)으로 여겨졌다가 1950년 대 이후 요석(要石)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이유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1969년 제주도지에 오키나와 특집이 실릴 무렵 아사히 저널에는 무라카미 카오루(村上薰)의 '다음의 전개-오키나와에서 제주도로(次の展開-沖繩から濟州島へ)'라는 내용의 글이 실린다. 또 비슷한 시기에는 군사전문가인 쿠즈미 타다오(久住忠男)의 오키나와 기지의 제주 이전설과 관련한 글이 발표되기도 했다.(村上薰, <次の展開-沖繩から濟州島へ>, 《朝日ジャーナル》, 1968. 6.2; 久住忠男, <沖繩基地の濟州島移轉說>, 《世界週報》, 1968.7.30.)

당시는 미군이 여전히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있었고 시정권 반환도 아직 합의되지 않았던 때였다. 베트남 전쟁도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이때 오키나와 미군 기지 제주 이전 문제는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군의 전략적 선택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자 미군기지 제주 이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기지 이전 문제는 일본 혹은 오키나와 내부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의 전략적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논평의 일환이었다. 

이제 기지를 사유해야 

제주와 오키나와의 오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냉전과 탈냉전이라는 세계 제체를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사실 강정의 해군기지와 도민 여론조사 결과로 동력을 잃어버린 제2공항 문제 역시, 단순히 안보와 개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오키나와의 현재를 제주의 미래로 만들려는 거대한 힘에 저항해 온 지난한 싸움의 과정이다. 도민 대다수의 반대를 확인한 제2공항 여론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단순 참고용’이니 ‘국가 정책을 뒤집을 수 없다’느니 하는 일부 정치권의 발언은 제주가 직면해온 역사에 대한 몰이해의 산물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폭력을 은폐해왔던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견이다. 

고시홍이 <물음표의 사슬>에서 상징적으로 그려냈듯 ‘민군 관광복합 미항’이라는 이름의 수사는 사실 제주의 임종을 바라는 국가의 탐욕이었다. 강정 해군기지를 당대적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는 있는 이 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이 해군기지는 오로지 중국을 압박하고 포위하는 제7함대의 기지로 사용되기 위해 지어지고 있습니다. 미 제국주의 대(對) 중국 해군기지 강력 반대! 동북아에 전쟁 몰고 올 강정마을 해군기지 강력 반대!! 평화의 섬 제주도에 군사기지 웬 말이냐? 4.3영령들이 통곡한다! 60년 전에는 미군정의 양민학살. 앞날에는 미 제국주의의 전쟁기지!!…

<물음표의 사슬>,  68쪽.

날 것 그대로의 구호를 인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기지 건설 과정의 찬반 갈등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반대파의 구호와 함께 찬성파의 그것들도 그대로 싣고 있다는 점에서 기지 문제와 관련한 서사적 선택은 유예되고 있지만 이러한 유예의 전략에도 불구하고 선전과 선동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기지 문제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미래를 우려하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징후적 시각이 오키나와가 먼저 겪은 기지 문제의 문학적 재현 양식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과제다. 하지만 제주와 오키나와가 냉전 체제라는 시공간을 거치면서 문학을 통해서 공동체의 기억을 소환하고 공동체적 질서를 위협하는 폭력적 구조의 변주와 반복에 대응해 왔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제주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오키나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리고 국가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 김동현

문학평론가. 제주에서 태어났다. 제주대학교 국문과와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 국민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는 《제주, 우리 안의 식민지》, 《제주, 화산도를 말하다》(공저), 《재일조선인 자기서사의 문화지리》(공저) 등이 있다. 한때 지역신문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지금은 제주, 오키나와를 중심에 두고 지역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제주 MBC, 제주 CBS 등 지역 방송 프로그램에서 시사평론가로, 제주민예총에서 정책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 일어, 중국어, 영어 번역본은 추후 추가될 예정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0 / 400
댓글 2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2
문대탄 2021-02-24 20:49:50
22일 MBC/제주의소리 제2공항 대담에서 부상일에게 KO패 당하는 걸 보고 어떤 분이신가 했다.
도민의 반대는 온평리 立地 반대라는 것을 눈치까지 못하고 (통계도 detail을 잘 봐야 악마를 볼 수 있다.) 제2공항 백지화를 주장하는 것을 보고 아차! 했다. 이 중대한 문제에서 오판하여 백지화 안 되거든 시사평론 잠시 쉬고 入山修道하시라.
'민군복합관광미항'이 "제주의 임종을 바라는 국가의 탐욕"?... 그거 바로 강창일이가 예결위 통과시키면서 붙인 멋진 이름이고, 노무현 정권이 밀어부치고, 문죄인이 국제관함식 열어 축하했지요. 그리고 1948년 제주는 인민위원회가 장악, 전국 유일하게 3개 투표소 중 2개소를 무효로 만든 '빨갱이섬'이었다는 건 잘 아시지요? 자라나는 도민들을 위해 잘 해 봅주.
61.***.***.60

페르난데스 2021-02-23 19:20:28
제주해군기지는 미 해군기지가 아닌 대한민국 해군 제7기동전단과 예하부대인 제주기지전대, 제93잠수함전대의 전진기지다.

역사를 왜곡한 물음표의 사슬은 즉각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49.***.***.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