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92) 유행가들, 김형수, 자음과 모음, 2021.

“내가 유행가를 듣는 시간은 고향을 사랑하는 시간이고, 내가 거쳐온 풍속사의 향기를 다시 맡는 시간이며, 세상살이에 지친 영혼을 달래고 위무하는 시간이다.”

- '유행가들' 가운데

‘유행가들’의 저자 김형수가 말하는 유행가의 의미 속에는 향수와 통속성, 위안 등 삶의 서사가 들어있다. 대중문화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유행가의 흐름을 타고 삶의 서사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노래의 문학성 덕분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노래를 음악과 동일시한다. 노래 속에는 음악의 핵심 요소인 멜로디와 리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노래는 음악과 같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노래에는 시가 있기 때문이다. 노래는 멜로디와 리듬뿐만 아니라 시적인 요소를 근간으로 하는 가사, 즉 노랫말이 있다. 음악적 요소에 더하여 문학적 서사가 더해짐으로써 노래는 독창적인 예술 영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유행가들, 김형수, 자음과 모음, 2021. 출처=알라딘.

엄밀하게 말하자면, 노래는 음악과 문학의 중간 지점에 존재한다. 노래를 이끌어주는 멜로디와 리듬은 그 노래의 기본적인 정서를 규정한다. 높음과 낮음, 김과 짧음, 빠름과 느림, 셈과 여림, 강함과 부드러움 등 음성기호의 다양한 요소들을 조합하여 청각적 기호를 창출해내는 음악적 요소들은, 노래를 노래로 존재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적 요소들은 가사를 입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노랫말 없이 성립 가능한 노래는 매우 드물다.

이렇듯 문학적 요소를 동반한 음악으로서의 노래들 가운데서도 빠른 속도로 퍼졌다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곤 하는,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노래들이 있다. 바로 유행가다. 근대사회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음반이라는 미디어는 유행가의 탄생과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것은 현장에서 육성으로 실연하던 음성 미디어를 복제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재현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창출했다. 음반이라는 미디어의 등장과 더불어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대중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유행가의 유행에 가속도가 붙었다. 

지난해부터 방송사에서 열풍이 일고 있는 트로트 프로그램들은 짧게 보면 일시적 퇴행 현상으로 볼 수 있으나, 근대기 이후 유행가들의 유행 유형을 분석해보면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일이다. 트로트가 창성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일제강점기와 산업화시대 초기, 1980년대 후반에 이어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로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노래들은 시대에 따라 돌고 돌며 반복적으로 유행하다가 어느 순간 불쑥 새로운 것을 창조해낸 후, 그것은 다시 유행가 사이클에 진입하면서 돌고 돈다. 

“이 책은 내가 음악을 잘 알아서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라디오, 전축, 녹음기 따위를 가져본 적이 없다. 인간의 마을에서 떠다니는 숱한 소리들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음악의 전부였다. 하지만 내 삶은 시대의 오지에서 한참 뒤떨어진 풍속사의 현장을 절묘하게 놓치지 않고 통과해왔다. 주막집 아들로 태어나 유년 시절을 온통 유랑극단의 노래들 속에서 보냈으며, 학교에 들어가서는 집 뒤에 극장이 생기는 바람에 그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오는 노래를 날마다 피하지 못하고, 또 나중에는 뮤직박스의 디제이를 했던 형에게 포크송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그리고 5·18을 겪은 이후 민중가요사가 그려가는 궤적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그 이름 없는 가객들에게 받았던 감동의 기억들은 내 영혼의 세포에 스며들어 오늘도 나와 함께 숨 쉬고 있다.”

- ‘유행가들’ 가운데

시, 소설, 평론, 평전, 대담 등 다양한 영역의 글쓰기로 문학인이자 논객으로 활동해온 김형수는 이 책 ‘유행가들’를 쓴 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그는 유행가에 담긴 통속성의 경로를 따라 20세기 한국사회를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의 정서와 서사를 추적한다. 유행가들의 생성과 사멸, 재생과 퇴행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해석하여 마침내 그 속에 담긴 시대정신을 통하여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그의 작업은 가히 유행가에 관하여 ‘이해’의 수준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준다. 

‘프롤로그-유행가들에 대한 짧은 노트’에서 저자는 트로트와 관련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유행가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들을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들려준다. ‘1부 유행가 지대’는 유행가의 예술적 위치에 대한 논평이다. ‘2부 어릴 때는 어린 노래가 있었다’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1970년대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행한 황성옛터와 신중현과 이미자를 소환한다. ‘3부 20세기의 청년들이 부르던 노래’는 송창식과 김민기 등의 포크음악을 다룬다. ‘4부 해도 달도 뜨지 않는 광주역’은 ‘님을 위한 행진곡’과 같이 광주정신을 담은 노래들을 다룬다. 유행가를 통하여 향수와 통속, 저항 등의 비평적 키워드로 20세기 한국사회를 들여다본 이 책은 한 마디로 ‘노래의 사회사’다.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
현(現)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경기문화재단 '평화예술대장정' 프로젝트 총감독 겸 정책자문위원장, 예술과학연구소장, 지리산프로젝트 예술감독, 미술평론가.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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