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67) 네비게이션 / 정용국

하늘에 난 길. ⓒ김연미
하늘에 난 길. ⓒ김연미

잠깐의 망설임도 한 치의 오차까지
재바른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직설로 되받아치는 얼음 같은 잔소리

경로를 이탈하고 우회전을 놓쳤어도
다시 또 일어서서 재탐색 유턴하는
깔끔한 너의 안목에 내 눈은 더 풀어지고

바뀐 길 새 건물도 흐려진 눈썰미도
내가 다 채워줄게 은근히 으스대며
어둠 속 새 길을 여는 그대 가쁜 목소리

-정용국, <네비게이션> 전문-

난 선천성 길치라는 병을 앓고 있다. 생각보다 심각해서 똑 같은 길을 두 번 가질 못한다. 지금까지 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도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다. 덕분에 나의 가족들은 로드여행을 많이 한다. 같은 길을 뱅글뱅글 돌아도 으레 그러려니 한다.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병이 어디 길치뿐이겠는가 마는 더 이상 얘기를 하면 내 얼굴에 침뱉기가 될 터이니 그만두고. 

선천성 이상증세를 앓고 있으면 후천적으로 그걸 극복해보는 노력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게 문제다. 세상은 세상의 모든 길치들을 위해 아주 친절하게도 실력 좋은 길 안내자를 만들어 냈으니...

그의 말대로만 하면 이 세상 어디에도 못갈 곳이 없다. 별로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불친절하지도 않게, 난생 처음 가보는 길도 그의 말만 듣고 가면 만사 오케이다. 아주 많이 고마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따로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불편함이 생략된 것이다. 이렇게 편한 세상이 또 어디에 있는가. 세상은 나를 위해 만들어졌고,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런 허구는 당장 나를 불편하게 한다.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아는 길도 찾아갈 수 없다. 나를 진화시켜내는 대신 내 외부에 나를 대신할 무언가를 만들어 놓는 다는 것은 결국, 종속관계를 만들어 내고, 어느 순간이 지나면 그 관계가 역전되는 경우를 종종 봐오지 않았는가. 

이미 우린 문명의 이기에 너무 깊이 빠져버렸다. 슬슬 그의 헛점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럼에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당신 말만 듣다 여기까지 와버렸어. 내가 가고자 한 건 여기가 아니었는데... 항의를 해 본들 소용이 없다. 텅 빈 머릿속을 부여잡고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와 버렸는지 헤아려 봐도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나를 개선해내지 못하고 너무 쉬운 길을 골라버린 댓가가 이렇게 심각할 줄이야. 돌아갈 길은 정녕 없는 것인가.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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