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93) 최호근, ‘제노사이드-학살과 은폐의 역사’, 책세상, 2005

최호근, ‘제노사이드-학살과 은폐의 역사’, 책세상, 2005
최호근, ‘제노사이드-학살과 은폐의 역사’, 책세상, 2005

4월이 온다. 제주의 봄은 오는가를 묻는 4월이 오고 있다. 이제는 봄이 왔다고 대답하는 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저항의 봄과 학살의 겨울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봄을 묻는 질문은 아프다. 

4.3을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는 논쟁적이다. 현재의 제노사이드 이론으로는 규정할 수 없다는 대답이 더 많다. 그렇지만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 결론에서도 제노사이드 협약을  지적했을 정도로 4.3을 이야기할 때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는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저자는 제노사이드에 관한 한 우리는 전혀 편하게 말할 입장에 있지 못하다고 쓰고 있다. 4.3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전후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집단학살의 상처가 아직도 우리 사회 안에 아물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성찰의 요구를 바깥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를 향해서 본격적으로 제기해야 한다”면서 제노사이드를 이야기해야 하는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

1948년 12월 9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는 1946년의 제노사이드 결의안을 바탕으로 모두 19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제노사이드 협약)을 92개국의 찬성으로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제노사이드 협약 제2조는 제노사이드를 “국민‧인종‧민족·종교 집단 전체 또는 부분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 ‘제노사이드-학살과 은폐의 역사’, 35쪽에서

제노사이드는 학술적 개념인 동시에 가해자·희생자 문제의 처리와 직결되어 있는 법적 개념이자 도덕적·정치적 개념이기 때문에 처벌과 예방 대책에 대한 논의는 물론 개념 규정에서부터 이미 많은 논쟁의 소지를 안고 있다. 유엔의 제노사이드 협약은 한 집단에 대한 가해자의 파괴 의도와 행위 모두가 현저하게 발견되어야 제노사이드로 인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저자는 나치 독일에 의한 유태인 학살도 절멸에는 이르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위의 규정에 의하면 제노사이드 범주에 포함시키기 어렵다고 하고 있다. 유태인 학살이 제노사이드 협약을 가져왔다는 역사적 배경이 있음에도 그만큼 제노사이드 개념 규정은 논쟁적이다.

우리는 원칙적인 선에서 제노사이드를 국가나 그에 준하는 권력체의 대리인들이 국민, 민족, 인종, 종교의 차이나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 또는 경제적 이해관계나 성, 건강, 지역상의 차이를 이유로 특정 집단을 절멸하려는 의도에서 그 구성원 가운데 상당 부분 이상을 계획적‧조직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 ‘제노사이드-학살과 은폐의 역사’, 73쪽에서

저자는 세계의 제노사이드라는 주제로 “프런티어 제노사이드, 나치 독일의 제노사이드, 민족과 종교의 학살 사례로서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보스니아와 코소보의 인종 청소를, 혁명의 이름으로 일어난 제노사이드의 사례로서 스탈린 치하의 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식민화와 탈식민화 과정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의 사례로서 프랑스의 알제리 학살, 르완다 내전 학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학살”을 다루었다. 우리 내부는 제주4.3과 보도연맹 학살을 제노사이드 이론을 적용시켜 다루고 있다.   

프론티어 제노사이드는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는 중에 발생한 제노사이드를 일컫는다. 17~19세기에 북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학살, 영국의 테즈메이니아인 학살(1803~1847)이 있었다. 체로키 인디언들이 치러야 했던 ‘눈물의 행진(Trail of Tears)’은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1937년 봄부터 1838년 가을까지 1만6000명의 체로키 인디언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오클라호마까지 걸어가야 했다. 이 행진은 9개 주에 걸쳐 1800마일을 걸어야 했고,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약 200일이 걸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살을 에는 듯이 차가운 바람, 굶주림, 질병 때문에 4000여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죽음의 장정이었다.

1933년 히틀러의 나치스가 집권한 뒤부터 1945년 히틀러의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독일과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은 이후에 펼져질 제노사이드의 거의 모든 모습을 만화경처럼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치는 인종적·민족적 이유에서 유대인과 집시, 폴란드인과 소련인을 죽였고, 종교적인 이유에서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을 절멸했다. 또한 사회적 약자인 동성애자들을 학살했고, 건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정신적·육체적 장애인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했다.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불리는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 집시 학살과 더불어 전형적인 제노사이드라고 인식되고 있다. 1915~1916년에 터키 정부가 주도한 학살로 1차 세계대전 직전에 210만명에 달했던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60만명에 불과했다. 

1991년~19991년 사이에 일어났던 보스니아와 코소보의 인종청소는 유고슬로비아 연방공화국이 해체되는 와중에 일어났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정규군과 민병대는 보스니아의 이슬람교도 지도자들과 크로아티아계 지식인들을 대대적으로 처형했다.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인종청소가 일어났다. 세르비아계는 점령하는 모든 도시와 농촌에서 이슬람교도들을 몰아냈다. 여성들에 대한 강간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일어났다. 이슬람교도들을 파괴하기 위해 가임여성들을 목표로 삼아 이루어진 성적인 제노사이드였다. 1999년 봄 세르비아가 코소보 자치주를 침공한 후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추방, 약탈과 강간, 대량 아사와 참수 등 최대 10만명으로 추산되는 주민이 희생되었다.

스탈린이 통치하던 시절에 소련에서 일어난 몇 차례의 학살과 크메르루주의 집권 뒤에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학살을 혁명의 이름으로 일어난 정치적 학살의 전형으로 꼽는다. 이들이 저지른 학살의 기본적인 성격은 동족에 대한 학살이라는 것이다. 이점이야말로 제노사이드 협약의 결정적인 맹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20세기에 일어난 제노사이드나 제노사이드성 집단학살 대부분은 식민화 과정 및 그에 뒤이은 탈식민화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식민지 본국이 도모했던 고도의 분열 정책 때문에 계급·지역·종교 갈등뿐만 아니라 민족과 인종 사이에 존재했던 갈등까지 엄청나게 증폭된 데 기인한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의한 알제리인 학살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대가 알제리를 떠난 뒤에는 프랑스에 협력했던 알제리인에 대한 학살도 일어났다. 벨기에의 식민지 지배부터 비극의 씨앗을 내포했던 르완다에서 1994년에 일어난 집단학살은 어느덧 새롭고 현대적인 제노사이드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후투족과 투치족의 내전으로 80여 만명이 사망하고 150만~200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발생했다. 1975년 12월부터 1979년 11월까지 인도네시아인에 살해된 동티모르인은 12만 명에 이르렀다.

“우리에게도 제노사이드가 있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1948년의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의 정의를 축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일어난 적이 없다. 그러나 제노사이드 협약 작성 과정에 참여했던 전문가 다수는 정치‧사회·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된 집단학살도 제노사이드 협약의 처벌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집단학살도 제노사이드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제노사이드-학살과 은폐의 역사’, 347~348쪽.

저자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이 책에서는 한국전쟁 전후에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에 주목해서 제주4.3과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제노사이드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4.3은 정치적 목적에서 기도된, 억압적 성격의 제노사이드였다고 규정하고 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였고, 제노사이드성 집단학살 수준을 훨씬 넘어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우리 안에서 제노사이드를 예방하고 면역된 사회를 만들려면 우선 아직도 그 증인들이 살아있는 한국전쟁 전후 학살 사건들로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곰팡내 나는 관계 기록들이 공개되고, 생존자가 증언하고, 가해자가 참회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그것으로 첫걸음은 충분하다고 한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 사회는 과거의 문제를 극복할 수도 없고, 과거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다. 그런 사회에는 미래도 없다.”

동티모르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통령을 지냈고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호세 라모스 오르타의 이야기는 많은 울림을 준다. 인간의 존엄성이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얼마나 빛날 수 있는가라는 경외감을 가지게 한다. 또한 제도적 해결 과정 이후 과거사청산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해답을 알려주는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2002년 자유를 쟁취한 동티모르인들은 환희에 찼지만 복수를 가하거나 승자의 정의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적을 존중하고, 사과를 요구하거나 기다리지 않고 압제자, 박해자들을 용서하였고, 인도에 반하는 범죄자 및 전범을 심판할 수 있는 국제재판을 받아들이이 않았습니다. 독립과 자유로써, 더 큰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믿은 것입니다.---고문을 행하고 사람을 죽인 자들은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았고, 여전히 범행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할 용기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문제입니다.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고문당하던 사람들의 비명과 얼굴을 매일 밤, 매일매일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를 얻었으며 분노와 증오의 포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과 굴욕의 비극적 역사에 발 묶이지 않을 것입니다.”

- 호세 라모스 오르타의 제7회 제주4.3평화포럼 기조강연 가운데

# 양정심

현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전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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