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元지사 ‘정치적 존재감 과시’ 외엔 설명 안돼

제주 제2공항 여론조사 결과 발표 이튿날인 2월19일. 원희룡 지사가 짧은 입장문을 냈다. 사실상의 결과 수용 선언이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속내나 의도가 쉬이 짚이지 않았다. 

“조사 결과는 … 국토교통부에 있는 그대로 신속하게 전달하겠다” 
“국토부의 현명한 결정을 기대한다”
“이제는 제2공항을 둘러싼 갈등에 마침표를 찍고, 도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일에 함께해 주시기를 바란다”

묘했다. 입장문은 간결하고 드라이했다. 동시에 복잡한 느낌을 줬다. 소신이 꺾여서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늦게나마 민심을 받드는 도백으로 돌아오나 싶기도 했다. 그만큼 입장문의 내용은 그 전과는 확연히 결이 달랐다. 이것 자체가 큰 진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원 지사는 공언을 이행했다. 2월23일 여론조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국토부에 전달했다. 제주사회 최대 갈등 현안이 이렇게 수습되어 가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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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제주도청에서 제2공항 정상 추진 입장을 밝히고 있는 원희룡 지사. 그러나 입장문에는 억지와 궤변이 가득해 민의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었다. 아니 순진했다. 3월10일 원 지사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단호한 어조로 제2공항을 정상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아가 제주도는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기까지 내보였다. 국토부가 제주도에 입장 표명을 요구하면서 정한 기한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입이 근질거렸을지 궁금했다. 나설 ‘거리’가 없었는데, 고맙게도 국토부가 공문까지 보내면서 말문을 틔워준 셈이다. 그래도 희생양이 필요했다. 아니나다를까 입장문은 국토부에 대한 성토로 시작됐다. 책임 떠넘기기를 의심했다. 

주장의 당위성을 강조하려는 마음이 앞섰는지, 입장문 속 ‘법적 절차가 마무리된 국책사업’이라는 문구가 국토부에 전달될 때는 ‘법적 절차가 진행중인 국책사업’으로 바뀌는 해프닝도 빚어졌다. 

뿐만 아니라 입장문에는 억지와 궤변이 가득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확증편향도 심각했다. 일례로 반대가 우세한 도민 전체 여론조사 결과에는 애써 눈을 감았다. ‘공항 인근 지역’ 과 ‘공항에서 먼 지역’으로 교묘하게 본질을 호도했다. 갈등을 해소해보자는 마당에 갈라치기도 이런 갈라치기가 없다. 성산지역 찬성비율이 높은 것을 두고는 주민수용성이 확보된 것으로 해석했다. 정작 삶의 터전을 뺏기게 된 4개 마을에서 반대가 높은 점은 외면했다. 

개인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국토부로 화살을 돌렸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여론조사 결과를 가감없이 전했는데, 왜 또 그러느냐고…. 공은 이미 넘어갔다고…. 도민 여론을 중시하겠다는 입장을 여러차례 밝혀온 터라 국토부로서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게 ‘도백’으로서 원 지사가 사는 길이었다. 그것은 또한 제주도 혹은 제주도민의 자기결정권 행사와 맞물려 원 지사의 정치적 입지를 더 다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원 지사를 너무 몰랐다. 2년여 전 외국인 영리병원과 관련한 숙의형 공론조사 결과를 비틀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당시 공론조사에선 반대가 월등히 높았는데도 원 지사는 불허 권고를 물리쳤다. 

상식적으로만 본다면 국토부가 제2공항을 추진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무리를 해서라도 반드시 추진해야만 할 또다른 무엇이 없다면 말이다. 그간의 약속, 도민 선택을 우선시한 대통령의 발언도 상식의 작동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영특한 원 지사도 이 점을 모를리 없다. ‘정상 추진’ 입장 발표 당시 한껏 톤을 높인 원 지사의 발언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국토부가 날짜를 박아서 의견을 달라고 했다. 충분히 도정과 소통하고 있던 상황에서 불쾌하다. (국토부의 입장 표명 요구는)도민 의견을 핑계로 (제2공항을)무산시키려는 수순이 아닌가” 

“이 정권이 제주 제2공항 문제를 어떻게 마무리지을지 모르지만, 제주지사의 형식적인 중립을 이유로 무산시키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어 확고하게 추진 의사를 표명한다”

원 지사는 국토부가 제2공항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원 지사는 추진 주체인 국토부도 내키지 않아하는 일에 팔을 걷어 부치려는 걸까?(원 지사는 입장문 말미에 ‘제주의 미래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위해 엄숙한 책임감을 가지고 제2공항을 추진해나겠다’고까지 했다. 추진주체 마저 바뀐 느낌이다.) 스스로 “제2공항은 국책사업” “추진주체는 국토부”라고 주구장창 외쳐대지 않았던가. 

대세를 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까. 아니면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정치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려던 것이라면, 동의는 못해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왠지 제주도민이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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