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94)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2020

출처=알라딘.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2020. 출처=알라딘.

1. ‘능력’이라는 단어의 폭력성

LH 직원의 땅 투기가 알려지자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사실인지는 모르나 한 인터넷 게시판에 LH 직원을 자처한 사람이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자신처럼 LH 직원이 되라고 비꼬았다고 한다. LH 직원이 되지 못한 소위 ‘무능력자’들을 조롱한 것이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당당하게 시험을 거쳐 LH 직원이 된 만큼 그 직위를 이용해 경제적인 보상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평등과 부정의를 자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생각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그 생각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겨질 때는 더욱 그렇다.

얼마 전에 온라인으로 받은 학교의 ‘인권·성평등 교육’에는 외모를 칭찬하는 것이 왜 잘못인지 가르쳐주는 내용이 있었다. 동료 교수나 학생이 멋지게 치장을 하고 온 것을 보고 ‘오늘따라 아름답게 보이시네요’라거나 ‘옷이 잘 어울리네요’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상대가 요청하지 않은 상황에서 외모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은 듣는 사람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며,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은 평가하는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갖게 된다. 갑작스럽게 원하지 않는 평가를 받게 된다는 점에서 외모에 대한 칭찬은 외모를 비하하는 것만큼이나 곤혹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 그런 칭찬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그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단순한 말 한마디로 누군가는 평가의 권력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은 졸지에 평가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일이 벌어진다. 각 사람은 이런저런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외모에 대한 평은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다. 

이런 관행을 고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정당하고 정의롭다고 여겨온 생각을 고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가운데 하나가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특히 신분제 사회에서 부와 권력이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에만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시험 제도’는 그 자체로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한 정의로운 제도로 인정받았다. ‘과거제’의 유산을 물려받은 우리 사회는 대학 입시나 고등고시 등을 공정한 계층 이동의 수단으로 자랑했다. 양반의 자제가 아니더라도 과거에 급제만 하면 출세의 길이 열렸듯이, 아무리 가난한 노동자,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좋은 대학에 입학하거나 고시에 합격하기만 하면 돈과 권력에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다. 

‘하면 된다’라는 구호는 필자가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가장 많이 접한 ‘급훈’의 문구였다. 머리를 길러서도 안 되고, 옷을 마음대로 입어서도 안 되고, 온통 안 되는 것으로만 가득했던 교실에 뜬금없이 ‘하면 된다’라는 액자가 걸려 있던 것은 다소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공부 이외의 모든 것을 금지한 교실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당연히 비록 가난하고 힘없는 집안에 태어났을지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비록 불리한 처지에 있더라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의 구호가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졌을 경우 노력을 통해 능력을 입증한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주는 것은 정당하고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전 세계적인 정의의 원리로 자리 잡았다. 

능력주의가 각광을 받은 것은 우연히 얻게 되는 ‘신분’이나 ‘가문’ 따위에 의해서 사회적 지위를 세습하는 것에 비하면, 노력을 통해 자격을 입증한 개인에게 더 많은 부와 명예를 갖게 하는 것이 더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보편적인 규범이 된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무한 경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능력주의는 출신 배경과 같은 우연적인 요소를 극복할 기회의 평등을 중시하고, 불리한 처지에 있더라도 노력하면 계층 상승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보장한다. 그러나 이런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의 이면에서는 이상하게도 폭력적인 피 비린내가 난다. ‘하면 된다’는 급훈 밑에서 공부한 친구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출세한 친구들은 문제의 LH 직원처럼 오만한 인간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평생 자신의 무능력을 자책하면서 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능력주의에 의해 운용된 사회가 더 평등한 사회가 되었을까? 능력주의가 실현된 사회, 즉 능력 있는 인간과 무능력한 인간으로 구별된 사회가 도덕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면 된다’는 말은, 했는데 잘 안 되었을 경우 모든 책임은 당사자가 지라는 무책임하고 냉혹한 구호였다는 점이다. 

2. 능력주의를 넘어서?

이미 ‘정의란 무엇인가’로 철학계의 유명 스타가 된 마이클 샌델이 이번에는 ‘공정하다는 착각’(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2020.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인데 직역하면 ‘능력의 폭정’ 정도가 될 것 같다.)을 통해 능력주의의 문제를 다루었다. 사실 능력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여러 분야에서 꾸준히 있어 왔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능력주의는 허구다’(스티븐 J. 맥나미, 로버트 K. 밀러 주니어 지음, 김현정 역, 사이, 2015)는 능력주의가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회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으며, ‘불평등 트라우마’(리처드 윌킨슨, 케이트 피킷 지음, 이은경 역, 생각이음, 2019)는 불평등을 겪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평등이 심하지 않다고 말하게 되는 심리적 원인을 능력주의 신화에서 찾고 있다.

샌델의 이 책은 다른 연구와 마찬가지로 능력주의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설사 그것이 작동하는 사회라고 하더라도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다른 책과의 차별점이 있다면 샌델은 공동체주의 철학자답게 능력주의가 갖는 도덕철학적 결함을 지적하고 좌우를 막론한 자유주의 철학자들이 능력주의에 편듦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용인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모두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5장 ‘성공의 윤리’에서 다루고 있는 능력주의의 철학적 결함의 문제와 7장 ‘일의 존엄성’에서 언급하고 있는 능력주의에 대한 가능한 대안에 관한 논의를 빼고는 매우 장황하며, 반복해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즉, 트럼프라는 특이한 인물이 대통령이 된 것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무능력한 인간으로 낙인찍힌 백인 노동자들의 불만 때문이며, 노력해서 성공하는 인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인간만이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능력주의적 인간관을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도자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은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52쪽)는 점이다.

능력주의의 결함을 비판하는 샌델의 논거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다른 논자들과 마찬가지로 샌델은 능력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관점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으며, 우리의 삶은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내가 어떤 재능을 타고 났다면 그것은 행운이며, 나의 재능을 후하게 보상해 주는 사회에 태어났다면 그것 역시 우연의 산물이다. 그런 내가 성공했다고 해서 후한 보상을 받는 것이 전적으로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능력주의는 사람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승자와 패자로 나눔으로써 공동체 구성원이 함양해야할 ‘공동선’에 대한 의식을 약화시키고 참된 의미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문제가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우파 자유주의자인 하이에크와 좌파 자유주의자인 롤스를 비교하는 대목이다. 경제적 재분배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 둘은 그동안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대변해 왔다. 그러나 능력주의를 잣대로 바라보면 이 둘은 놀랍게도 일치점을 보인다. 먼저 이들은 시장에서의 성공이 능력에 대한 보상과 무관하다고 보았다. 하이에크는 시장의 성공은 행운의 결과라고 주장함으로써 재분배론을 차단하려고 한 반면, 롤스는 시장의 결과가 능력이나 자격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을 배격함으로써 오히려 재분배론을 주장하고자 했다. 둘의 목적은 달랐지만 양자 모두 “경제적 보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하면 안 된다고”(216쪽) 본 점에서 반능력주의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샌델에 의하면, 하이에크는 “부자들에게 비록 그들의 부가 곧 능력의 징표는 아니지만 사회에 그만큼 크게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징표”(225쪽)라고 말함으로써, 그리고 롤스는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위해 유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차별적 지위를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감으로써(최소극대화를 지향하는 격차 원리) 결과적으로는 능력주의에 편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적 계층 이동이 아무리 활발한 사회라고 하더라도 계층 간의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사회가 오만한 능력자와 굴욕을 느끼는 무능력자로 구성되어 있는 한 평등과 정의는 요원할 것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샌델의 대안은 능력주의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단지 경제적인 보상을 해주는 정도의 보완책이 아니라 근원적인 차원에서 그들에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함으로써, 시민성을 되살리고 공동선에 입각한 사회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샌델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오늘날 경제에서 누가 만드는 자이고, 누가 가져가는 자인지에 대한 논쟁은 결국 기여적 정의론으로 귀착된다. 어떤 경제 역할이 명예와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생각이다. 이런 사고 과정은 무엇이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인가를 따지는 공적 토론을 필요로 한다. 나는 제안한다. 급여세의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하여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투기 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토론의 주제로 삼을 것을.” (342쪽)

샌델의 이런 제안에 귀 기울이는 정치가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제안이 실제로 능력주의에 균열을 가져올지도 미지수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구호가 말만 그럴싸한 사탕발림에 불과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굴욕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된 상황이 도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샌델의 제안은 시의적절하다.

# 이유선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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