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게, 고치가게] (3) 정직한 고추장인 제주 서문고추 박복순 할머니의 ‘상도(常道)’를 듣다

2021년 창간17주년을 맞은 [제주의소리]가 오랜 기간 제주 곳곳을 지키며 이어온 공간과 인물을 소개하는 연중 기획 [이어가게, 고치가게]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점포(老鋪)와 그 속에 숨은 장인(匠人)들을 소개합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미래의 나침반입니다. 제주의 기억을 이어가고 앞으로도 함께 지켜감으로써, 제주의 미래를 같이 가꾸고 조명하자는 취지입니다.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이야기는 제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이들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제주의 오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춧돌이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서문고추와 반세기를 함께한 박복순 장인. 1938년생인 그는 50년 넘게 고추장사를 이어왔다. ⓒ제주의소리
서문고추와 반세기를 함께한 고춧가루 장인 박복순(84) 할머니. 1938년생인 그는 50년 넘게 고추가루 가게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아들이 대를 잇고 있다.  ⓒ제주의소리

 “내가 언제부터 고추 장사를 했더라? 한창 젊었을때 내가 애들만 보고 있으니 잘 아는 언니가 나보고 장사하면 잘 할거라고 한 번 해보라고 했어. 제주차부(현 용담로터리) 옆에 오일장에 고춧가루를 들고 갔는데, 정말 그 날 깨끗이 다 팔았어. 첫 날인데도... 그게 언제 쯤이냐고? 1967년인가 1966년인가 정확히는 모르겠네. 가게는 1971년부터 했어. 누가 흉볼지 몰라도 난 100살이 되어서도 고추가게에 나와있고 싶어”

고춧가루에 울고 웃는다. 고추 때문에 아프거나 행복해진다. 제주시 오일장 좌판에서 우연히 시작한 고추장사는 이제 만 54년이 넘었다. 그의 고춧가루 가게는 반세기 넘게 제주 서문시장을 지키고 있다. 자타공인 제주 최고의 고춧가루 장인이 된 그는 갓 서른의 젊은 새댁에서 벌써 나이 여든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됐다. 서문고추 박복순(84) 사장님의 이야기다. 

단골들은 한 번 이 집의 고추를 맛보면 다른 물건은 성에 차지 않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시내에서 멀리 이사를 해도, 제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수십년 째 그의 가게를 찾는다.

세상이 변해도 “좋은 고추만 판다”는 철칙은 단 한 번 어긴 적이 없다. ‘정말 까다로워야 하면서도 중요한 게 고추장사’라는 게 이 곳의 경영철학이다. 건강한 식재료에 대한 걱정이 많은 요즘, 1938년생 박복순 할머니의 고집은 장인의 품격을 잘 보여준다.

서문고추는 1971년부터 서문시장 안을 지키고 있다. 제주시 원도심에 위치한 이 시장의 역사가 고스란히 쌓여있다. ⓒ제주의소리
서문고추는 1971년부터 서문시장 안을 지키고 있다. 제주시 원도심에 위치한 이 시장의 역사가 고스란히 쌓여있다. ⓒ제주의소리

고추가 안 좋으면 모든 것이 맛이 없다

“잘 익은 고추도 잘 숙성시켜서 말려야지, 그냥 따서 기계에 놓아버리면 색도 안 나고 맛이 없어. 잘 말린 고추는 꼭지가 노래. 기계에 바로 말린 건 꼭지 파랑색이야. 이 파란 고추를 만지면 부드럽지 않아. 고추가 안 좋으면 만질 때 만지면 부드럽지 않고 빳빳하다고. 그러면 안돼. 부드러워야해”

여든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그의 눈과 손끝은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민첩하하다. 좋은 고추만이 그의 눈과 손을 통과할 수 있다. ‘안 좋은 물건은 절대 팔지 않는다’라는 게 그 스스로 50년 넘게 지키고 있는 약속이다. 그는 ‘단돈 천 원 깎아본 적 없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손님들이 ‘싸게 달라’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품질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추가루를 만들어달라며 가져온 손님의 고추가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는 쓴소리를 참지 않는다. 아예 돌려보내는 경우도 있다. ‘먹어도 되는지 모르고 가져와버린’ 사람들이다. 과거 어려운 시절, 할머니들이 이런 고추를 가져오면 ‘그건 버려버리라’고 하고는 몰래 좋은 고추가루를 챙겨줬다.

한 번 단골은 이사를 한 뒤에도 버스를 타고 먼 거리를 돌아 이 곳을 찾는다. 그의 단골은 제주 곳곳은 물론 서울 등 다른 지역에도 있다. 

“고추가 좋아야 김치가 맛있어. 제일 좋은 고추로 김치를 담가서 먹어봐. 콩나물 하나 무치는 것도 말이 달라. 우리 손녀딸이 요리에 취미가 있는데, 서울 이태원의 한 식당에 가보니 고춧가루가 너무 나빠서 맛이 안 나더래. 그래서 우리 고추를 하나 보내줬더니 거기서 ‘고추가 왜 이리 맛있냐’고 하더라고. 무채를 무칠 때도, 우동에 넣는 고춧가루 한 방울도 좋은 고추를 놔야 맛있어. 고추가루가 안 좋으면 모든 게 맛없어. 굉장히 중요한 거야”

까다로운 안목으로 그는 전국 곳곳의 질 좋은 고추를 공급하는 농장들과도 돈독해졌다. 전남, 전북, 충북, 경북 등 곳곳의 농장들과 수십년째 거래를 하다보니 ‘좋은 물건 나오면 서문고추를 줘야지’하고 먼저 전화가 온다.

고추박사의 면모는 고추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가 ‘좋은 고추가 왔을 때’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좋지 않은 물건이 왔을 때’다. 영락없는 고추장인이다.

“물건이 나빠서 돌려보낼 때 제일 맘이 아파. 좋은 걸 보내오면 좋은데, 안 좋은 게 들어오면 속상하고 아프고 그래. 다른 게 아니라 나는 고추가 안 좋으면 아파. 그거를 ‘빠꾸’시키면 얼마나 속상하던지...” 

박복순 장인이 고추를 다듬고 있다. 꼼꼼히 고른 좋은 고추를 섬세하게 다듬는 일은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제주의소리
박복순 장인이 고추를 다듬고 있다. 꼼꼼히 고른 좋은 고추를 섬세하게 다듬는 일은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제주의소리

다리 폭파된 한강을 건너

‘서문고추는 가면 믿을 수 있어 좋다’는 소리를 수십년 간 들어왔다. 여든셋의 나이에 고추를 다듬고, 자식들에게도 가업을 물려줬다. 서문고추가 도민들 마음 속에서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될 만큼 자리 잡았다. 늘 온화한 미소를 품고 있는 그다.

하지만 그의 어린시절은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서귀포 중문에 살던 그는 어린 시절 몸이 많이 아팠다. 그는 ‘그냥 그 당시 애들이 아픈 것처럼 아팠다’고 설명한다. 13살까지는 항상 몸이 아파 힘들었단다.

서울에서 일을 찾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작은아버지를 따라 그도 뭍으로 향했다. 당시 아버지가 일하던 곳은 비누, 양초, 성냥 등을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를 비롯해 제주 사람들도 여럿이 함께 일을 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작은아버지는 ‘장가갈 돈이 있으면 책 한권 더 사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학문을 좋아했던 수재였다.

이들의 새로운 일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어머니, 동생 둘과 함께 1.4후퇴의 피난 행렬 속에 뛰어들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상상하기 힘든 난리였다.

한강 다리가 끊어져 조각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고 한다. 모래사장에서 밤을 새고, 끊임없이 걷고, 트럭도 얻어 타고, 기차를 타고, 다시 걸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땅끝 전남 장흥까지 오게 됐다. 40일만의 일이다. 산전수전을 겪고난 뒤 가까스로 목포에서 겨우 배를 타고 고향 제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제주로 돌아온 뒤의 이야기도 궁금했다. 그러나 ‘가게를 열 때까지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도,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는 물음에도 그는 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힘들지 안해...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그런데 나 힘든 건 말 안하젠. 말할 수 없지. 말할 수가 없는 거라. 말 안할 거”

전쟁통에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행방불명됐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일상을 꾸려나갔다.

서문고추는 그의 아들과 며느리도 함께하는 가족경영회사다. ‘최고의 물건, 정직한 장사’라는 어머니의 철학을 물려받아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제주의소리
서문고추는 그의 아들과 며느리도 함께하는 가족경영체다. ‘최고의 물건, 정직한 장사’라는 어머니의 철학을 물려받아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제주의소리
50년 경력이 넘으니 전국 어디에 좋은 고추가 있는지 두루 꿰고 있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맘에 쏙 드는 좋은 물건이 들어왔을 때라고 그는 말한다. ⓒ제주의소리
50년 경력이 넘으니 전국 어디에 좋은 고추가 있는지 두루 꿰고 있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맘에 쏙 드는 좋은 물건이 들어왔을 때라고 그는 말한다. ⓒ제주의소리

감사, 또 감사 “도민들 덕에 서문고추 있었다”

그는 1970년 서문시장 안에 가게를 얻었다. 골목 맞은편으로 터를 한 번 옮기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서문고추는 한 번도 이 곳을 떠난 적이 없다.

“손님들이 알아주니까, 그럼 나는 열심히 하고... 그러니까 오래 할 수 있었지. 그 덕에 장사할 때 그렇게 힘들어보진 않았어. 어떤 사람은 우리 가게보고 (믿을만한다는 의미에서)‘저기는 흙을 갖다놓아도 팔릴 곳’이라고 표현하더라고. 그러니까 얼마나 고마워. 정말 고마워”

서문고추도 고민이 없을리 없다. 고추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닫는 와중에도 명맥을 이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식과 며느리가 가업을 이어가는 것을 두고 ‘너무 행복하고, 뿌듯하다’면서도 ‘미안하다’고 표현했다. 혹시나 자신이 가진 애착 때문에 아이들이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그걸 놓지 못하는 건 아닐까, ‘어떤 일이라도 잘할 애인데 혹여나 나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이 많단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도심 서문시장도 한창 때와 비교하면 조용해진 것이 사실이다. 원도심의 장인들이 묵묵히 버티기에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이 업을 놓지 않는 것은 꾸준히 서문고추를 찾아오는 손님들 덕이다. 그는 인터뷰 내내 서문고추를 기억하고 찾아주는 도민들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덕분에 정말 행복했다고.

“나는 고추장사하면서 매일 행복했어. 우리집 오는 손님은 많이 주라는 소리를 안해. 더 넣으란 소리도 안하고, ‘무사 영 비싸니’라는 소리도 안 들어봤어. ‘그냥 알앙 좋은 거로 주라’고만 해. 단 한 번 물건으로 싸워보질 않았어. 손님들에게 지금도 다 감사해. ‘나 이렇게 살게 해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어. 나 지금 걸어다닐 수 있고, 이렇게 앉아서 고추 다듬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애들 밥도 해줄 수 있고. 지금 그 이상 더 바랄 게 없어”

박복순 장인은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던 중 그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었다. ⓒ제주의소리
서문고추 박복순 할머니는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던 중 그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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