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김헌범 논설위원·제주한라대 교수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백년대계가 정치적 노름판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우려된다

뒷맛의 찝찝함 

원희룡 지사가 제2공항 건설에 대한 도민들의 여론조사 결과와 달리 “강행”의사를 천명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여론 결과에 대한 입장문에서 원 지사는 “국토부에 있는 그대로 전달하겠다”고 밋밋하게 말하면서도 “주민들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정치적 수사(修辭)는 한 마디도 없었다. 단지 “제2공항을 둘러싼 갈등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그의 공언으로 당연히 수용 가능성을 추론했을 뿐이다. 그러나 3년 전 공론화 여론조사 결과를 뒤집고 국내최초 영리병원 허가를 내줬던 원 지사의 전력(前歷)은 여전히 “찝찝함”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결국 도민들에게 다시 한번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도지사는 공적인 입장임에도 개인적인 의견을 가질 수는 있다. 또 제2공항 부지 선정과 추진 과정에서 여러 석연치 않은 의혹들과 불합리한 문제점들을 해소하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도 있다. 백번 양보해서 제주공항 확장을 대안으로 제시한 ADPi(파리공항공단 엔지니어링)의 권고안을 읽어보지도 않은 듯, TV토론회에 나와 고장 난 녹음기처럼 “안전과 소음” 문제만을 반복 재생하며 제2공항에 대한 소신을 피력하는 것까지도 용납할 수 있다. 

변명의 궁색함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에 대한 불복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인격적으로 용렬하다는 신상적인 비판은 차치하고라도 주민자치시대에 민주적으로 수렴한 주민들의 의사를 자의적으로 뒤엎는 ‘쿠데타’라는 정치적 비난을 받아도 당연하다. 70, 80년대 군부정권의 시대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그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주인공 엄석대가 시골 초등학교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공부 일등, 싸움 일등으로 ‘코흘리개’ 급우들에게 어설픈 왕 노릇을 하던 서사를 다시 읽는 기분이다. 도민들과의 공적인 약속을 주저하지 않고 마음대로 번복하는 자신감이 놀랍다. 

주권자에 의해 권력을 위탁받은 자가 주권자 위에 군림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오죽해야 원 지사가 큰절까지 올리며 받드는 군부독재의 레전드인 전두환조차 직선제 여론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을까. 섬이라는 좁은 바닥에서는 아무래도 돋보일 수밖에 없었던 전국구 인재라는 해묵은 자만심이 독선과 아집을 키운 것일까. 불복으로 인한 도민들의 반발과 파장이 예전과 달리 예상치 않게 확산하는 형국이다.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 원 지사는 여론조사가 요식절차에 불과했다는 뉘앙스로 애써 의미를 깎아내리려 하지만 궁색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지난 10일 제주도청에서 제2공항 정상 추진 입장을 밝히고 있는 원희룡 지사. 그러나 입장문에는 억지와 궤변이 가득해 민의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제2공항 문제에 대한 최고의 대안은 원 지사가 여론조사 결과를 깨끗이 받아들이고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데서 시작된다. 도민들이 오랜 갈등을 끝내고 함께 미래를 일궈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원 지사의 겸허한 ‘마음 비우기’에 달렸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외통수의 배신

이번 조사가 단순한 여론조사가 아니라는 것쯤은 모든 도민들이 잘 알고 있다. 30퍼센트가 넘는 놀라운 여론조사 응답률을 기록한 적극적 참여는 도민들이 이 이벤트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음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찬반 간 갈등과 반목이 절정에 달하면서 오랫동안 교착상태에 빠진 제2공항 문제를 진척시키기 위한 다른 방도가 없던 ‘외통수’ 상황에서, 제주도와 도의회의 합의를 바탕으로 도민들의 직접 투표를 갈음하는 ‘아고라’의 공적 행사가 시현됐음을 상기해야 한다. 당사자 간 승복을 전제로 하지 않았으면 여론조사를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여론조사가 성사된 것에는 당연히 원 지사의 기대감도 크게 작용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제 와서 본인의 생각과 다른 결과가 나왔으니 원천 무효라는 것인가. 그동안 도민들의 여론과 담을 쌓느라 도민들의 의사를 몰랐던 자신을 탓해야 한다. 과거의 과오가 때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할 때 가능한 것이다. 엘리트의 자존심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여전히 자의적인 해석으로 오히려 도민들에게 가르치려 드는 모습에서 승복하는 기색은 찾아보기 어렵다. 

함수의 기발함

여론조사 결과가 지시하는 민의는 너무나 간단명료하다. 흔한 말로 요즘 ‘초딩’에게 물어도 무시한다고 되레 성을 낼 정도다. 한 마디로 제2공항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 공영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반대 여론이 우세하게 나온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변한다. 

“오차범위 내 우세에 불과하다. 성산지역 주민들에게는 압도적으로 찬성이 나온 반면에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반대가 높았다. 공항이 멀리 떨어져 불편해진다고 생각하거나, 지금의 상권이 위축될 것으로 우려한 것이 아니냐. 이런 이해관계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마음대로 취사선택에 의한 ‘짜깁기’ 해석이 놀랍다. 결과에 대한 승복이 전제인 조사임에도 두 개의 여론조사 중 굳이 오차범위 내 결과가 나온 조사만 언급해 주장을 뒷받침한다. 게다가 표현은 완곡하지만, 선거철이 아닌 평소에 도민들에 대한 그의 인식을 일부 드러낸다. 제2공항에 반대하는 진정성을 보는 게 아니라 사소한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속물이나 ‘님비’쯤으로 여긴다. 반대 도민들이 대화의 상대가 아닌 교정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또 천재적인 머리지만 짜내느라 고생한 듯한 “찬반과 지역 간 함수관계”라는 기발한 이론도 현란한 궤변이다. 

새우의 아우성

이 이론의 눈속임은 반대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찬성 이유는 언급하지 않는데 있다. 찬성 또한 선의로만 볼 수 있을까. 찬성 여론을 그대로 그의 함수이론에 대입하면 “공항이 가까워서 편리해진다고 생각하거나, 상권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에 대한 기대감이 작용했다”라고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다 공항 예정지에 미리 땅을 사놓아 “대박의 꿈”을 꾸는 투기꾼들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찬성과 반대 여론 모두 그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이다. 결과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여론조사 결과에도 도정의 최고책임자인 원 지사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 인해 예상되는 비극의 ‘데자뷰’에 있다. 공을 넘겨받은 국토부가 제2공항을 추진할 동력이 떨어졌다. 국책사업이라도 주민들의 삶에 직결되는 사업은 자율적인 의사에 맡기는 게 촛불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현 정부의 정책기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원 지사가 추진의사를 표명한 상황에서 국토부가 사업 포기를 선언하는 악역을 자처할 가능성도 높지 않다. 백년대계라는 현안이 중앙정부와 제주도와의 핑퐁게임으로 상당 기간 공중으로 떠버린다는 말이다.

이렇게 제2공항 문제가 결판나지 않고 정치적 놀이판으로 이용되는 경우, 현재 포화상태에 이른 제주공항의 시설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동안 토지 소유권과 사용권의 제한으로 피해를 입은 성산읍의 해당 주민들도 정당한 보상을 받기는커녕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래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 신세가 될 것이다. 제2공항 문제에 대한 최고의 대안은 원 지사가 여론조사 결과를 깨끗이 받아들이고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데서 시작된다. 

도민들이 오랜 갈등을 끝내고 함께 미래를 일궈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원 지사의 겸허한 ‘마음 비우기’에 달렸다. 결단을 바란다. / 김헌범 논설위원, 제주한라대 교수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