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3주년 기획] ③ 가족관계등록부 정리 등 실질적 명예회복 조치 과제

제주4.3희생자와 유족들의 염원을 담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안이 문재인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3월23일 공포됐다. 전부개정안에는 추가 진상조사와 희생자 특별재심, 특별한 지원방안 강구 등 명예회복과 상처 치유를 위한 내용이 담겨 있다. 6월24일 시행을 앞둔 전부개정안은 완결이 아닌 명예회복을 위한 또다른 여정의 시작이다. [제주의소리]는 제73주년 4.3추념식을 앞두고 4.3특볍법 전면개정안의 의미와 과제를 세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주]

"기쁜 일이지요. 감사한 일이고. 그런데 나는 너무 섭섭하고 기분도 안좋아요. 다른 어른들은 다 인정됐는데 왜 우리 부친은 안되는 것인지. 우리 아버지는 그냥 죽어도 억울한데 그 누명을 여지껏 쓰고 있는 것 아니겠어."

모처럼 따뜻한 봄이 찾아온 4.3. 배보상·특별재심 내용이 담긴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4.3수형인이 무죄 판결을 받는 등 잇따른 낭보가 전해졌지만, 서귀포시 남원읍에 거주하는 김명립(82) 할아버지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4.3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지만, 김 할아버지의 부친 故 김영수(1907년생) 씨에 대한 재심은 요원했다. 수형인 명부상의 본적과 주소, 생년월일 등이 제적등본과 일치하지 않아 재심 대상자로 선정되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고, 평생 지병처럼 앓아오던 트라우마 증세는 최근에 이르러 오히려 더 심해졌다.

서귀포시 남원읍 자택에서 만난 김명립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서귀포시 남원읍 자택에서 만난 김명립 할아버지. 부친인 故 김영수(1907년생) 씨가 4.3 재심 대상자에 오르지 못하면서 억울한 희생에 대한 '한'이 더 깊어졌다.   ⓒ제주의소리

4.3의 광풍이 몰아치던 1949년,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살던 김 할아버지는 9세의 나이로 토벌대를 피해 가족과 함께 산에 숨어 살았다. 중산간지역 소개령과 군경의 자수 권유에 의해 하산해 제주시내 주정공장에서 3~4개월 간 강제 구금된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행적은 그 이후부터 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가혹한 취조를 받은 후 군사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으로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6.25가 발발하며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까마득히 시간이 흐른 한참 후였다.

'도대체 왜 내 아버지가 형무소에?' 늘 궁금했다. 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에게 소금을 조금 나눠줬다는 이유로 국방경비법 32조, 소위 '간첩죄'로 끌려갔다는 것도 귀동냥을 통해서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간첩죄'라고? 유년의 아들은 늘 의문이었다.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기에 사망일을 알 수도 없었고, '가메기 모른 식게(까마귀도 모르는 제사)'를 지내 온 세월이 어언 70년 세월이었다. 유년시절, 아버지가 없는 가족의 생활고도 고역이었지만, 모든 가족이 연좌제에 엮여 평생 누군가에게 감시 당하는 삶은 참 가혹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간첩죄라는데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당했겠어요. 안한 것도 하게끔 하려고 죄를 인정받아야 하니까...우리 부친이 집 주소까지 모를 어른이 아니었다고. 얼마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문을 당했을지 알 길이 없죠."

최근 무죄 판결을 받은 4.3수형인들도 남아있는 행정기록이 온전치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다만, 김 할아버지의 부친의 경우 본적과 주소, 생년월일 등의 정보가 모두 일치하지 않아 재심이 어렵다는 법적 자문을 받아야 했다. 

가문의 족보와 4.3당시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주민의 인우보증(隣友保證)을 받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명예회복이 이뤄질 지는 아직 알 길이 없다.

창문 너머 먼 곳을 응시하는 김 할아버지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었다. "아버지 시체도 못찾고. 살았을리는 없을 것이고, 돌아가셨을거야. 대체 아버지 죄가 뭔지나 명확하게 묻기나 해보고 나서 나도 죽었으면 좋겠는데...이제 팔순이 넘으니까 그런 서러운 생각이 들어요."

국가기록원에 보존돼 있는 김명립씨의 부친 故 김영수 씨의 수형인 명부. 사진=김영수씨 유족
국가기록원에 보존돼 있는 김명립씨의 부친 故 김영수 씨의 수형인 명부. 사진=김영수씨 유족
국가기록원에 보존된 故 김영수씨 수형인 명부. 주소가 실제 본적과 다른 남원면 한남리로 명시돼 있다. 사진=故김영수씨 유족
국가기록원에 보존된 故 김영수씨 수형인 명부. 주소가 실제 본적과 다른 남원면 한남리로 명시돼 있다. 사진=故김영수씨 유족

뒤틀린 4.3기록 바로잡으려면 70년 삶 부정해야

4.3으로 인해 운명이 송두리째 바뀐 이삼문(80) 할아버지의 사연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옛 제주 노형리 함박이굴 출신인 이 할아버지는 4.3으로 인해 부모와 두 형, 누나, 할머니까지 모두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됐다. 굶주림과 외로움을 견뎌 온 세월은 한 개인이 받아들이기 버거웠다.

친족 집을 전전하다 운이 따라 자신을 친자식처럼 아껴주던 김종군이라는 이름의 해군장교에게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해군 장교였다는 것만 기억할 뿐, 당시 이삼문 할아버지도 나이가 너무 어려 해군장교의 계급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김종군 씨가 당시 제주도내 모 고아원 관계자에게 '이 아이(이삼문)를 목포로 데려다주면 찾으러 가겠다'는 말을 남겨 이 할아버지는 전남 목포의 고아원으로 터를 옮기게 됐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아버지처럼 자신을 아껴주던 김종군 해군장교와의 조우는 물거품이 됐다. 그러다가 굶주림을 참지 못해 고아원에서 뛰쳐나왔고, 음식을 찾아 시내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됐다. 인민군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는 굴에 숨어 지냈고, 무작정 골라 탄 배에서 제2의 가족이 된 박호배 씨와의 연이 닿았다.

지난 2018년 3월 31일 제주4.3증언본풀이를 통해 사연을 전한 이삼문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지난 2018년 3월 31일 제주4.3증언본풀이를 통해 사연을 전한 이삼문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그집 사랑방에서 지낸지 3년쯤 지나 13살쯤 됐을 때, 박호배 씨는 이 할아버지를 자신의 양자로 호적에 올렸다. 다만 원래 아들 위로 호적을 올릴 수 없어 나이를 낮췄다.

1941년생 이삼문씨는 그렇게 1953년생 박삼문씨가 됐다.

그의 사연은 4.3 70주년을 앞둔 지난 2018년 3월 제주4.3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4.3증언본풀이를 통해 알려졌다. 이후 이 할아버지는 4.3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기 위한 절차를 밟았지만, 끝내 유족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유족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가족관계등록부 정리를 통해 70년 전의 이씨 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미 박씨로 살아 온 70년의 삶을 송두리째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미 자손들까지 모두 박씨로 살아왔는데 자신만 이씨로 돌아가지 못했다.

끝내 4.3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 할아버지는 큰 상실감을 토로하고 있다. 언론 등 외부와의 접촉도 일절 하지 않고 있다. 

 개정 4.3특별법, 가족관계 정정 등 핵심 과제 남았다

4.3희생자와 유족 간 행정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해방 직후 제대로 된 행정시스템이 갖춰질리도 만무했지만, 실제 출생일보다 늦게 출생 신고를 하는 것은 그저 관행일 뿐이었다.

4.3수감자들이 갖은 고문과 옥고를 치르며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 주소와 생년월일 등을 거짓 자백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4.3생존수형인과 행방불명 수형인 335명에 대한 재심 과정에서도 이 같은 사정이 참작돼 유족으로서 인정되기도 했다.

종전까지 가족관계의 증명과 오롯이 희생자·유족 당사자들의 몫이었다. 희생자의 아들·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유해가 발굴되지 않고서야 스스로 제적을 고쳐야 했다.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관련된 내용이 담긴 개정된 4.3특별법 제4장 제12조에는 '제주4.3사건 피해로 인하여 가족관계등록부가 작성되어 있지 아니하거나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경우에는 다른 법령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대법원규칙으로 정하는 절차에 따라 가족관계등록부를 작성하거나 기록을 정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개정안 통과로 행방불명인 3500여명에 대한 법률적 정리와 함께 실질적인 명예회복을 위한 가족관계등록부 정리 문제도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가 됐다.

3년만에 재개된 제주4.3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7차 추가신고를 통해 지난 3개월간 1만2000여명의 희생자와 유족의 신청이 이어졌다. 4.3실무위원회의 본격적인 심사가 진행됨에 따라 개정된 특별법 적용 범위도 주목되고 있다.

조정희 제주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장은 "4.3 당시의 제적 기록이 달라 피해를 보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 단순히 가족관계등록부나 호적 정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난 70년의 삶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며 "4.3중앙위원회 차원에서 희생자·유족들이 피해를 보지 않게끔 해석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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