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3주년 기획] 남은 과제 ‘정명(正名)’...“항쟁, 통일운동 등...치열한 열린 논의 필요”

4.3 73주년을 앞둔 제주에는 봄이 오고 있습니다. 4.3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살아왔던 생존수형인과 행방불명인들이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또 4.3특별법 제정 21년만에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배보상, 추가 진상조사, 특별재심 근거가 마련됐습니다. 

오랜 어둠의 터널을 뚫고 4.3의 완전 해결에 조금 더 다가선 겁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그 중 하나가 4.3의 올바른 이름을 찾는 일, 바로 정명(正名)입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 가면 누워있는 비석 ‘백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백비는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말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4.3의 이름을 짓지 못한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물입니다. 백비 앞 안내문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2003년 정부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했지만, 사건의 정의를 내렸을 뿐 성격 규정은 미뤘습니다. 4.3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은 것입니다.

왜 4.3 정명이 쉽지 않을까요? 김종민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4.3은 광주항쟁처럼 짧은 기간이 아니라 무려 7년 7개월동안 벌어졌습니다. 세 개의 국면으로 나뉘는데요, 첫째는 경찰 및 서북청년단의 탄압, 탄압의 국면이 1년 동안 이뤄집니다. 그에 대해 고문치사 사건까지 벌어지고, 그 다음 항쟁의 국면이 4.3무장봉기로써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1948년 11월 초토화작전때는 탄압, 항쟁이라는 용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엄청난 대학살의 국면이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7년 7개월 동안 탄압-항쟁-대학살의 국면이 있는데, 이것을 한 데 모아서 어느 하나의 단어로서 명명하기가 곤란했습니다”

제주4.3평화공원 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 비석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제주의소리
제주4.3평화공원 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 비석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제주의소리

사실, 민주화 이전만 해도 국가는 4.3을 폭동으로 규정했고 4.3을 입밖으로 꺼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국가폭력과 대학살이라는 진상이 알려진 지금도 여전히 일부 극우세력들은 4.3이 폭동이나 반란이라는 주장을 폅니다.

4.3의 정명, 이름짓기 논의가 본격화 되면서 4.3을 항쟁으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해방 당시 제주도민들은 근대 국가를 형성해가는 주인공으로서 단독선거를 저지하는 등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과 투쟁이 있었다는 겁니다. 단순히 희생이나 대량학살에 의한 희생과 억압을 당한 존재뿐 아니라 저항정신을 지닌 역사의 주체라는 얘기죠. 다만 이 역시도 합의되거나 확정된 개념은 아니라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항쟁이라는 단어에는 적극적 의미도 있고 소극적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광주항쟁 때 군부 세력에 의해 파괴돼가는 민주주의를 지키려 봉기를 한 것은 적극적 의미의 항쟁입니다. 소극적 의미로는 항쟁이란 건 탄압에 대한 반응입니다. 다시 말해서 계속 고양이에게 쫓기던 쥐가 구석에 몰리면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고양이를 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제가 항쟁이라는 용어를 아직 시기상조로 여기는 이유는 4.3 당시 군경토벌대에 의해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이 됐는데, 그때 무장대에 의한 희생도 약 10% 가량 됩니다. 그 희생자 중에는 군인, 경찰, 극우 청년단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일부 무장대의 일탈행위로, 무장대의 과오로 죽은 애꿎은 도민들도 있습니다. 그분 유족들의 심정도 헤아려 봐야 합니다. 마치 그러한 사건들은, 무장대에 의한 억울한 사연은 없었던 것인양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김종민 전 전문위원)

‘제주4.3항쟁-저항과 아픔의 역사’를 펴내고 정명 문제에 대해 오랜기간 고민해온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980년대에는 그 당시 민중항쟁, 민주화투쟁이라는 시대적 조건이 있었고 민중이라는 표현자체가 어떻게 보면 학생운동권이나 시민운동단체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4.3때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제주도민의 마음과 결부가 돼서 민중항쟁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항쟁에 초점을 둔 정명 문제제기가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정명이라는 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여기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항쟁과 저항의 역사적인 측면입니다. 또 한 쪽에서는 항쟁만 얘기할 수 없는 엄청난 학살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과의 거리감도 없어야 합니다. 그 당시 4.3의 적극적인 측면, 좀 더 나은 사회를 꿈꿨던 제주도민의 꿈을 우리가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용어가 있을까(고민중인데) 지금 시점에서는 제가 꼭 항쟁을 써야할지는 고민입니다” 

오는 6월 30일까지 제주4.3평화기념관 2층에서 진행중인 제주4.3아카이브 특별전 '기록이 된 흔적'에 전시된 자료들. 당시 포스터와 보고서 등에 '항쟁'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제주의소리
오는 6월 30일까지 제주4.3평화기념관 2층에서 진행중인 제주4.3아카이브 특별전 '기록이 된 흔적'에 전시된 자료들. 당시 포스터와 보고서 등에 '항쟁'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제주의소리

지금까지가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을 위해 달려온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 핵심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끔찍한 비극이었던 제주4.3에 올바른 이름을 붙이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입니다. 4.3이 지닌 다양한 국면과 흐름 때문에 쉽지 않은 주제면서 신중해야 하는 사안입니다. 동시에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의 연결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가 요구하는 커다란 역사적 과제가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가장 꼭대기에서 가장 큰 규정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분단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정책을 갖고 정당한 논쟁을 하고 국민들의 마음을 사서 집권하기도 하고, 내놓기도 하고 이렇잖아요? 이런 것들이 정상적인 정치 상황인데 우리는 맘에 들지 않으면 ‘너 빨갱이지’, ‘너 좌파지’, ‘너 좌파 포퓰리즘이지’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분단상황이 아니었다면, 6.25전쟁이라는 비극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한국만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입니다. 

제주의 4.3은 바로 분단을 막겠다는 것을 전면에 슬로건으로 내세웠습니다. 지금 분단 시대를 극복하는 제일 중요한 의제, 역사적 사명은 평화통일이고, 제주4.3은 평화통일을 지향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는 4.3을 통일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김종민 전 전문위원)

“4.3을 현재화시키는 작업 속에서 중요한 지점은 우리는 논쟁을 해야한다는 점, 얘기를 해야되는 점입니다. 학살과 피해 측면도 얘기하고, 전부 다 얘기하고, 이 속에서 치열한 논쟁들도 있고 논의 과정도 있고, 그러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4.3을 자꾸 호명해야 되고, 얘기를 해야 합니다. 

4.3의 학술적 측면 뿐 아니라 일반 평범한 제주도민 여기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사람들, 평범한 시민들이 4.3을 이해하고 4.3의 정명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열린 공간들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논의의 구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양정심 실장)

제주4.3특별법 전부개정안이 통과되고, 불법 군사재판을 받았던 희생자들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것은 완결이 아닌 또 다른 여정의 시작일 뿐입니다. 

제주4.3평화공원에 누워있는 백비가 일어설 그날, 제주에 따뜻한 봄이 오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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