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주년 4.3희생자 추념 전야제 ‘그날의 기억, 피어나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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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주년 4.3 희생자 추념 전야제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제주4.3 전야제는 4.3을 기억하기 위해 생겨난 제주 예술인들의 모임 ‘제주민예총’이 1994년 처음 시작했다. 27년 역사를 이어가는 동안 우여곡절도 제법 겪었다. 고령의 유족을 포함해 대중적인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고민했고, 한때는 저조한 참여로 어려움을 겪었다. 예술적으로는 여러 장르를 선택·융합하면서 새로운 무대를 모색했고,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당대 가장 필요하거나 한 걸음 앞서가는 4.3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지난 2014년 제주4.3평화재단이 전야제를 단독 주최하면서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평화재단 전야제는 평범한 대중가요 공연장과 다를 바 없는 내용으로 비판을 받았다. 다행히 4.3 70주년을 맞는 2018년에 민간단체가 주축이 된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전야제를 책임졌고, 다음해부터는 다시 제주민예총이 기획하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올해 73주년 4.3 전야제 ‘그날의 기억, 피어나는 꽃’은 선명한 메시지는 잃지 않고, 동시에 유려한 표현력으로 공감대와 에너지를 동시에 선사하는 진화의 기점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 일관된 구성, 또렷해진 메시지

2일 제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이번 전야제는 흥미로운 변화가 보인다. 이전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행사의 글·구성 역할이 자료집에 명확하게 적시된 것이다. 김동현 제주민예총 정책위원장(문학평론가)가 담당했다. 2019년 71주년 전야제에서 한 꼭지를 맡아 발표했던 김동현 위원장은, 이번에는 행사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구성을 들고 왔다.

제주4.3특별법이 개정되고, 생존 수형인에 대한 법원의 무죄선고도 내려지고 있다.
제주4.3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던 노력의 결과다.
하지만 여전히 잊히길 강요당하는 이름들이 있다.
기억되지 않는 항쟁의 함성도 있다.
특별법 개정은 미완의 진실, 4.3의 역사적 정명을 위한 하나의 시작이다.

- 73주년 4.3 전야제 오프닝 가운데

김동현은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는 동안,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잊히길 강요당하는 이름, 잊지 말아야 할 이름, 잊을 수 없는 얼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을 신신 당부한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눠 풀이되는데 아직도 마지막 흔적이 묘연한 행방불명인, 그리고 항쟁으로서 4.3이다.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행방을 찾지 못하는 억울한 영령들을 앞으로 특별법 개정 이후 더욱 가열 차게 찾아야 한다는 것. 또한 항쟁은 단순히 남로당이나 특정 인물만에 주목하기 보다는 4.3 당시 도민들이 왜 무기를 잡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는지부터 제주 공동체가 서북청년회와 경찰로부터 위협 받았던 과정, 전 도민이 참여했던 총파업, 그리고 당시 대다수 도민들이 꿈꿨던 이상적인 통일조국까지 아우른다고 봐야 한다.

지난해 4.3 72주년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밝힌 “누구보다 먼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제주는 처참한 죽음과 마주했고,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간절한 요구는 이념의 덫으로 돌아와 우리를 분열시켰다”는 내용과 맞닿아있다.

전야제 글, 구성, 스토리텔러(사회)를 맡은 김동현 평론가. ⓒ제주의소리

주최 측은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예술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그때 산으로 오른 사름들, 만세 불러난 사람들, 잡혀가고, 매맞아난 삼촌들, 이제랑 죄 아니랜 햄수다’라고 말하는 놀이패 한라산의 연기, 스토리텔러의 행불인 12명 신상 낭독, 가족애를 노래한 사우스카니발 강경환의 ‘달’, 현기영의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 가운데 이덕구 주검이 관덕정 광장에 내걸린 대목 낭독, 뮤지컬 ‘레 미제라블’ 노래 ‘민중의 노래’ 합창 등이다.

미래 세대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4.3 예술에 관심을 기울여온 청년 극단 ‘청년 모닥치기’로부터 제주대 학생들의 4.3 진상규명 활동을 이끌어낸다. 제주지역 대학교 총학생회들은 영상으로 힘을 보탰다.

특히 4.3 학살 주동자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의 사형 장면을 재현했다. 앞으로 문상길 중위는 콘텐츠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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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패 한라산의 연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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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모닥치기의 연기. ⓒ제주의소리
합창단이 '민중의 노래'를 개사해 부르고 있다.  ⓒ제주의소리

앞서 언급한 ‘민중의 노래’와 ‘달’은 4.3에 맞게 개사했고, 전야제 마지막을 장식한 뮤지컬 영화 ‘위대한 쇼맨’ 삽입곡 ‘This is me’ 역시 봄이 오고 있음을 강조하며 가사를 고쳤다. 원희룡 제주도지사, 유족회 관계자, 양조훈 평화재단 이사장, 이종형 이사장의 각각 추념사 역시 이러한 전체 메시지 안에서 의미를 조금씩 달리했다.

이번 전야제는 피해자들이 숨죽이고 역사가 침묵할 때 예술이 가장 먼저 나선다는 일종의 책임 의식을 잘 반영했다. 특별법이란 테두리에서 미처 소외될 수 있는 행방불명인을 빠뜨리지 않고, 재조명 받아야 하는 4.3항쟁의 가치를 용기내서 꺼냈다. 다만, 거부감이 들도록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대중들의 평균 눈높이를 맞춘 듯 힘을 조절했다. 이것은 다음, 다음 너머를 감안한 완급 조절로 다가온다.

# 버릴 것 없는 연출의 힘

제주민예총이 올해 전야제에 싣고자 하는 이 같은 주제 ‘그날의 기억, 피어나는 꽃’은 꼼꼼한 연출의 힘으로 날개를 달았다.

무엇보다 영상의 힘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주최 측은 무대에 총 다섯 개의 영상 화면을 무대에 설치했는데, 전야제 순서마다 가진 내용에 맞게 영상 콘텐츠를 제작했다. 낭독은 꽤 전부터 전야제에서 쓰여 새롭진 않지만 그림과 글을 입체적으로 등장시켜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서 이덕구 그림이 대표적이다. 

완이화 공연은 영상 활용의 백미였다. 이별에 대한 곡 ‘상사화’와 가정의 소중함을 말하는 ‘단 하나의 집을 원해요’에서는 4.3유족들이 그린 옛 기억 그림을 꺼내 감동을 선사했다. 가족과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의 삽입곡 ‘Remember Me’에서는 4.3을 겪은 옛 제주도민들의 흑백 사진을 나열하며 의미를 배가 시켰다. 깔끔한 기술뿐만 아니라 무대와 알맞게 신경 쓰면서, 내용을 더욱 빛내는 그야말로 '배경 이상의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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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ember Me'를 부르는 완이화.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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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장면. ⓒ제주의소리

정적인 낭독, 동적인 합창을 대비시키는 구성도 인상적이다. 특히 합창은 커다란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뮤지컬 노래로 선택했는데, 가사를 바꾸면서 완성도나 취지를 살렸다. 4.3 극예술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놀이패 한라산을 전면에 활용한 시도 역시 반갑고 적절했다. 짊어진 세월의 무게만큼 어울리는 연기였다. 전야제 대미를 장식한 스트릿잼댄스 아카데미의 폭발적인 군무와 브레이크 댄스, 그리고 필뮤직 합창단은 즐겁고 힘찬 분위기 속에 ‘우리가 4월이고 4.3’이라는 역사 인식을 새기는 색다르고 멋진 연출이었다.

결국 4.3 70주년부터 전야제 연출을 맡은 김명수 이다 대표의 연출력과 김동현 위원장의 필력·구성력이 돋보인 전야제였다. 무대에 집중한 출연진들 역시 마찬가지. 개인적으로 이번 전야제가 한 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 문예회관 대극장을 나서는 관객들 반응도 엇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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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마지막 무대는 스트릿잼댄스아카데미와 필뮤직 합창단이 장식했다. ⓒ제주의소리

사족을 더하자면, 노래 가사를 화면에 띄우는 것은 장·단점이 있는데, 개사하는 성의가 더해진다면 적절한 표현 방법을 고민해서라도 관객들에게 보여줘도 좋지 않을까 싶다. 

올해 4.3 전야제를 두고 진화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그냥 맨땅에서 솟아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30년 가까이 전야제와 4.3예술 자체를 지켜온 예술인들이 있었기에 어느새 새로운 힘이 더해지는 순간도 찾아오고, 발판 삼아 힘껏 도약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렇게 진화된 작품을 만나며 또 다른 미래세대가 뜻을 이어받고 그렇게 4.3예술은 세대에서 세대를 건너며 이어가는 게 아닐까.

더불어 예산 지원 이외 제작 과정에 간섭을 최소화한 4.3평화재단의 태도 역시 바람직하다.

73주년 4.3 전야제는 코로나19로 인해 미리 초청한 유가족 150명 등 일부에 한정해 현장 공개했다. 코로나19 걱정 없이 남녀노소 가득 모일 4.3전야제를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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