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념식장에서 만난 사람] 4.3평화공원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비 찾은 유족들
“동생이 억울하게 끌려가신 아버지에 대한 행방불명 희생자 재심 재판에 갔는데 무죄 소식을 전해줬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앞으로도 이런 억울함을 덜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아무 이유 없이 잡혀가 온 가족이 초토화됐으니 말이야.”
학살의 광풍이 몰아치던 4.3당시 화북 벌랑동에 살고 있던 이주향(76) 할머니는 끔찍한 그 날 아버지와 그 형제들을 잃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건 작은 아버지와 고모, 할머니뿐이었다.
아버지인 이한성 고인은 영문도 모른 채 주정공장으로 끌려가 대구형무소로 보내진 끝에 행방불명됐다. 어디 계신지라도 알면 시신이라도 수습해 넋을 달랠 텐데 그럴 수 없어 이 할머니는 매해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비를 찾는다.
“4.3당시 화북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부두 근처 주정공장으로 끌려가 소식이 끊기고, 둘째아버지는 정뜨르비행장으로 잡혀간 뒤 다시는 볼 수 없었어. 아버지 형제가 네 분인데 한 분 빼고는 다 잡혀갔지.”
그나마 올해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당시 생존수형인과 불법 군사재판에 따른 행방불명인에 대한 재심 결과 육지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무죄 판결을 받게 돼 억울함을 조금 덜게 됐다.
둘째아버지는 정뜨르비행장으로 끌려간 뒤 소식을 알지 못하다가 공항 아래 시신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지만, 지금은 파볼 수 없어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비를 찾아 넋을 달랠 수밖에 없단다.
이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길고 긴 설움을 내뱉으며 비바람이 몰아치는 궂은 날씨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찾아 어루만졌다. 준비해온 음식들을 펼쳐놓고 “아버지 나 와수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영령의 넋을 달랬다.
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통과된 것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서는 “개정안이 통과됐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완전 해결까지는 아니겠지만, 완벽하진 않겠지만 개정돼서 다행이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은 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예비검속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비를 찾은 한연숙(83) 할머니는 아버지인 한학수 고인을 만나기 위해 악천후의 날씨에도 4.3평화공원을 찾았다.
아버지의 위령비가 모셔진 것도 2019년에야 알게 된 한 할머니는 가까스로 위령비를 찾아 가방 고이 포장해 온 과일과 빵, 소주를 제단에 올렸다.
당시 제주읍 외도리 연대마을에 살던 아버지는 4.3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영문도 모른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내가 12살 때 당시 뒷집에 살고 있던 선생이 육지서 큰 전쟁이 터졌다고 알려줬어. 그러고 이틀도 안 돼 지서에서 집에 들이닥쳐 아버지와 뒷집 선생을 끌고 갔지. 이후 선생은 돌아왔는데 우리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살아오지 못했어.”
한 할머니는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곤 소주를 제단 주변으로 뿌린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왔다는 소식에 “비 오는 궂은 날씨에도 왔구나. 작년에도 오고 그래도 감사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