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17) 이른 이도 복, 늦은 이도 복

사람의 일이란 마음먹었다고 그대로 되는 게 아니다. 생각했던 대로, 뜻한 대로 되면 얼마나 순탄하랴만 그렇지 못한 게 인생사다.

실제로 자식 농사의 경우를 보면 그걸 실감하게 된다. 일찍 혼인해서 젊은 나이에 태어난 자식은 그만큼 사회 진출이 빠름은 말할 게 없다. 옛날 여자 열여섯은 이팔청춘이라 시집가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여간 자식을 일찍 본 게 아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혼인이 늦어 자식을 늦게 볼 수도 있다.

이럴 때, 일찍 본 자식과 늦게 본 자식을 비교해 일찍 태어났으니 잘되고. 늦게 태어나 잘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함이다. 일찍 출생했든 늦게 출생했든 다 저만 큼의 복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얘기다.

사람의 이런 경우를 농사에 빗대 말하기도 한다. 농경사회에서 농사짓는 데 많이 비유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농사를 지을 때 파종을 일찍 할 수도 있고, 늦게 할 수도 있다. 제 철만 놓치지 않으면 그만이다. 보름쯤 혹은 스무 날쯤 늦고 이를 수 있는 법이다. 일찍 파종해 자라는 농작물이라고 잘된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일찍 시작했다가 태풍에 큰 피해를 당할 수 있는 반면, 늦게 시작했다 태풍 피해를 벗어나는 수도 없지 않다.

당근의 최적지인 구좌의 농부들이 빈번히 겪는 일이다. 일찍 파종해 싹이 터 파릇파릇 돋아날 때쯤 큰물에 휩쓸리는 경우, 얼마나 참혹한가. 농부들이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맛보게 된다. 그러면서 다시 휩쓸린 밭에다 다시 씨를 뿌려야 한다. 아픔을 견뎌내야 하는 게 농사인 걸. 그래서 자고로 농사는 하늘이 하는 거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자식 농사든, 농작물을 씨 뿌려 김매 거둬들이는 농사든 그 시기의 이르고 늦음이 하늘에 매인 것이라 사람 소관이 아니라 함이다. 그러니 어중간하게도 ‘이른 이도 복, 늦은 이도 복’이라 말했지 않을까 한다.

1983년 가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대천동에서 한 아낙네가 ‘얼멩이’로 콩알과 지푸라기 따위를 쳐내고 있다. ‘얼멩이’는 대오리로 구멍을 크게 엮어 만들어서 곡식 따위를 쳐내는 도구다. 출처=고광민, 제주학아카이브.
1983년 가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대천동에서 한 아낙네가 ‘얼멩이’로 콩알과 지푸라기 따위를 쳐내고 있다. ‘얼멩이’는 대오리로 구멍을 크게 엮어 만들어서 곡식 따위를 쳐내는 도구다. 출처=고광민, 제주학아카이브.

이 말의 외연을 조금만 넓히면 ‘새옹지만(塞翁之馬)’에 닿을 것 같다. 중국 변방에 살던 노인의 말이 어느 날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 버리자 주위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아쉬워하자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 누가 알겠소?” 했는데,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가. 곁에서 잘됐다 축하하자. 이번에는 “이 일이 화가 될 줄 누가 알겠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노인의 아들이 오랑캐 말을 타다 낙마해 다리를 다쳤다.

다들 노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자. 이번에도 “누가 알겠소?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 했다.

1년이 흐른 어느 날, 마을에 오랑캐가 쳐들어온 게 아닌가. 마을 장정들이 전장에 나가 싸우다 모두 죽고 말았는데, 낙마해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됐던 노인의 아들은 싸움에 나갈 수 없어 무사했다.

그래서 사람의 운수라는 것은 알다가도 모른다 해서 ‘새옹지마’다. 복불복(福不福)이라는 것, 좋은 일 나쁜 일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이른 이도, 늦인 이도 복’이라 함이다. 우리 선인들 이렇게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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