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96)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롄커(閻連科), 번역 김태성, 웅진지식하우스, 2018.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롄커(閻連科), 웅진지식하우스, 번역 김태성, 2018. 출처=알라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롄커(閻連科), 웅진지식하우스, 번역 김태성, 2018. 출처=알라딘.

천하위공天下爲公

이는 쑨원孫文이 즐겨 써서 유명해졌는데, 원래는 '예기·예운禮運'에 나오는 말이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공공公共의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은 어느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공유물이라는 뜻이다. 늦어도 서한西漢 시대에 나왔으니 기원전에 한 말이다. 그런데 그보다 이전에 “하늘 아래 온 세상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강과 바다에 접한 모든 세상에 왕의 신하가 아닌 이가 없다(普(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시경·소아·북산北山)고 하지 않았던가? 대대로 한 집안사람이 왕 노릇을 하였으니 천하는 개인의 것이지 어찌 공공의 것이겠는가? 여기에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원문을 보면, ‘천하위공’ 앞에 “대도지행야大道之行也”라는 전제가 있다. 대도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공의 것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은 대도가 숨겨져 있어 천하가 일가에 소유가 되었다(今大道旣隱, 天下爲家).” 같은 글에 나오는 말이다. 

대도가 숨어있지 아니하고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온 세상 사람들이 실컷 먹고 배를 두드리며(함포고복含哺鼓腹), 땅을 두드리며 태평한 세월을 노래하던(격양가擊壤歌)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 천자라 칭하던 이가 천하를 공공의 재물로 여겼던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남자가 정치라는 미명 하에 천하에 군림한 이후로 결단코 한 번도 천하가 개인이 아닌 공공의 것이 된 적이 없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

1944년 9월 8일 거행된 장쓰더(張思德)의 추도회에서 마오쩌둥 주석이 한 말이다. 장쓰더는 사천성의 빈농 출신으로 18살 어린 나이에 홍군에 참가하여 몇 년 후 공산당원이 된 인물로 중앙 경비단에서 마오쩌둥의 경위로 근무하면서 직접 전투에 참가했으며, 고단한 장정長征에도 참여했다. 이후 부하들과 함께 섬북陝北 토굴 안에서 숯을 만들다가 돌연 굴이 무너지는 바람에 29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았다. 마오쩌둥은 추도회에서 사마천이 친구인 임안에게 보내는 '보임안서報任安書'의 유명한 구절,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 깃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으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를 인용하면서 장쓰더처럼 인민의 이익을 위해 죽는 것이야말로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통해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목표가 인민을 해방시키고, 철저하게 인민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후 이 말은 소학교 6학년 교과서에 실리면서 모든 국민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중국공산당의 종지宗旨이자 사회주의 도덕의 근본으로 상정되어 공산당원은 물론이고 모든 기관, 공직자의 좌우명이자 행동강령이 되었다. 일종의 최고 모토이자 슬로건인 셈이다.  

표어와 신조 

표어(슬로건)나 신조(모토)는 일종의 희망사항이다. 아직 이루지 못했으니 이렇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새해 벽두가 되면 금연, 절주하겠다고, 또는 열심히 돈을 벌어보자고 다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가끔씩 그것은 역으로 속내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컨대 전두환은 1980년 8월 국보위 상임위원장 시절 “정당한 대가가 치러지는 사회”,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이 존경받고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이후 들어선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 구현’을 국정과제로 삼았다. 아시다시피 그가 마련하겠다는 정의사회는 출범에 앞서 이미 붉은 피가 묻어 있었으며,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친인척, 측근 비리는 물론이고 그 스스로 정당치 않은 대가로 억만금을 편취하며 심하게 얼룩졌다. 이 정도면 슬로건이나 모토, 또는 강령이나 정강政綱이 주창자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미화시키기 위한 노골적 가리개이자 자신의 탐욕을 가리기 위한 거짓 변명임을 알 수 있다. 

표어와 신조가 정치의 색깔을 띠면 일종의 강요이거나 협박이 된다. 내가 이렇게 할 것이니 너는 그대로 따르라. 정치는 잘 모르지만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인민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때려잡자 김일성, 물리치자 공산당.’ ‘공가네 가게(공자의 학설)를 깨부수자(打倒孔家店).’ 그래도 이 정도면 약과다. “묶지 않으면(정관수술) 집을 무너뜨리고, 낙태하지 않으면 방을 허물고 소를 끌어낼 것이다.” “핏물이 강을 이룰지라도 초과 출산은 허락할 수 없다.” 이런 참혹한 언어들이 현실에서 연출되는 모습을 담은 소설이 모옌의 '개구리(蛙)'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옌롄커(閻連科, 1958~현재)의 문제작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2005년)의 주인공 우다왕吳大旺은 사단장 사택에서 취사를 담당하는 고참병이자 사단장의 가정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바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있는 모범 공산당원이다. 그가 사단장보다 열하고도 예닐곱 살이나 어린 사모님이자 이후 누님이라고 부르게 된 류롄劉蓮이 생활하는 이층으로 올라가 옷을 홀딱 벗고 방금 씻은 알몸을 드러낸 것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고 적힌 나무 팻말이 부엌 부뚜막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단장이 출장을 갈 때마다 이층으로 올라간 그는 성욕에 불타오르는 그녀와 몸을 섞는다.

“인민을 위해 어떻게 복무하겠다는 거지?”
“누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지. 어서 벗어.”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가운데 일부

두 사람이 사랑의 행위를 할 때마다 섬세하고 진지한 자세로 몸과 마음을 다할 때 쯤 부대는 외지로 훈련을 떠나게 된다. 거대한 영내가 텅 비기가 무섭게 그 ‘팻말’이 부엌 부뚜막에 올라가 있었다. 두 달 간에 걸친 두 사람의 성애는 성실했다. 아니 지나치게 자유분방했다. 그 여파로 옷장에 있던 마오쩌둥 주석의 전신 석고상이 바닥에 넘어져 산산조각 났다. 이제 그들은 모두 반혁명분자가 된 셈이다.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는 두 남녀에 의해 마오의 초상화가 찢겨져 나가고, 어록과 선집選集, 그 신성한 보서寶書가 갈가리 찢겨져 바닥에 내던져졌다. 

“그녀는 인쇄된 마오 주석의 두 눈에 대못을 하나씩 박았고, 그는 세숫대야에 쓰인 ‘사사로운 이익에 대해 투쟁하고 수정주의를 비판해야 한다.’는 마오 주석의 어록 다섯 글자 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자신의 사욕과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要自私自利).”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가운데 일부

인민을 위해 복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가면을 벗고 속내를 드러낸 순간이다. 

인민이란 누구인가? 

한 때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작심했을 때가 있었다. 아마도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말부터 들었던 생각이 아닌가싶다. 심지어 변절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 ‘신조’가 완전히 바뀌어 이미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하지만 내 조국은 남과 북이 갈라져 있고, 내 민족은 극우와 극좌가 공존한다. 좀 더 들어가 보면, 남과 여가 구분되어 있고, 빈자와 부자가 서로 경원시하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은연중에 드러나며, 심지어 지역마저 서로 백안시한다. 무엇이 조국이고 무엇이 민족인지, 그리하여 어떤 조국을 따르고 어떤 민족을 좆아야 하는지 헷갈릴 뿐이다. 처음부터 조국과 민족은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중년 이후의 일이다. 

인민人民도 그러하다. 이른바 민중, 대중, 노동자 등의 총칭으로서 인민은 토지와 정사와 더불어 제후의 보물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 국가의 보통 사람으로 소수의 특권자와 구별되는 이들을 뜻하기도 한다. 여하간 한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구성원으로서 노동대중을 뜻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를 위해 복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옌롄커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조국과 민족이 그러한 것처럼 인민도 갈가리 찢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말은 위정자의 거짓이거나 변명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을 철저하게 까발리기 위해 옌롄커는 성애를 끄집어낸다. 이는 이 책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이미 번역 소개된 '물처럼 단단하게(堅硬如水)'(2001년)를 보면, 혁명과 성애를 연결시켜 ‘혁명’(특히 문화대혁명)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진 온갖 추악한 몰골이 사실은 기본적인 욕망의 가장 추악한 드러냄이었음을 밝혀내고 있다. 예일대학 출신의 중국계 학자 샤즈칭(夏志淸)은 옌롄커의 작품을 ‘하드 코어 리얼리즘(hard-core realism, 노골적인 사실주의)’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의 평어가 매우 적절하다. 

약간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마오 주석과 관련한 물건들(석고상, 초상화, 어록, 선집 등)을 여지없이 산산이 부서뜨리는 대목에서 두 사람의 성애는 최고조에 달한다. 인민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에 대한 자각이었을까? 아니면 ‘임신’으로 인한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절망감의 표현이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독자의 몫이다.

맺는 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도시와 그 다음 큰 도시의 우두머리를 뽑겠다고 매일 시끄럽다. 정치는 태생부터 말을 먹고 사는 생물체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충언이나 설득은 물론이고 온갖 소문과 거짓, 협박과 아첨, 욕설과 비방이 ‘유세’의 이름으로 공존하는 그 말을 듣는 이들은 정말 정신 사납다. 어차피 ‘천하위공’이든,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든 그것이 말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도 믿고 싶다. “천하의 근심을 다른 이들보다 먼저 생각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다른 이들보다 나중에 구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매일 읊조리며 자신에게 엄격했던 송대 정치가 범중엄范仲淹과 같은 이가 몇 명은 있지 않을까?

#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다. 역서는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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