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동백이 원래 붉은 꽃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더 붉고 더 많이 피었다. 지난 3일 제73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제주4.3평화공원에서 봉행되었다. 이날 추념식은 코로나19 방역으로 참석인원이 70여 명으로 제한되었지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방장관과 경찰청장이 참여하여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영령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헌화함으로써 4.3추념식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 3월 23일 추가 진상조사와 희생자 특별재심, 특별 지원방안 강구 등 명예회복과 상처 치유를 위한 내용이 담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 전부개정안이 문재인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공포됨으로써 4.3희생자와 유족들의 응어리를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4.3’은 제주사람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주제이고, 함부로 떠올릴 수 없는 고통스런 단어이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당시 제주도민 가운데 아홉 명 중 한 명이 희생되었다. 그러기에 제주사람 치고 ‘4.3’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4.3’으로 누군가는 아버지를, 누군가는 어머니를, 또 누군가는 양친 모두를 잃었고, 누군가는 아들을, 누군가는 딸을, 또 누군가는 자식들을 모두 먼저 떠나보냈다. 그리고 ‘4.3’으로 누군가는 형제를, 자매를, 오빠를, 누이를 영영 만나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4.3’으로 조부모와 손자, 삼촌과 조카라는 말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가족들 모두가 희생됨으로써 슬퍼할 사람조차 없는 집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4.3’에서 살아남은 이들도 대부분은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고, 상당수는 반공이념에 따라 폭도의 부모로, 빨갱이 자식으로 낙인찍혀 숨죽여 살아야 했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군경(토벌대)에 의한 경우도 있고, 산사람(무장대)에 의한 경우도 있어서 도민들은 누군가에 희생되었느냐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었다. 그리고 왜 죽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희생된 이들도 부지기수이고, 행방불명되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몰라서 돌아간 날이라도 알고 시신이라도 찾아보겠다는 그 작은 소망마저도 들어줄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제주4.3평화공원 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 비석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제주의소리
제주4.3평화공원 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 비석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고, 안내문에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적혀 있는 것이 전부다. 앞으로 4.3의 남은 과제 중 하나가 올바른 이름을 찾는 일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그동안 분단 이데올로기에 갇혀 살아온 우리에게 ‘4.3’의 명예회복의 길은 멀고도 더디었다. ‘4.3’이 발발하여 50여 년이 지난 2000년 1월에야 김대중 정부는 ‘4.3특별법’을 만들어 ‘4.3’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첫 단추를 끼웠고, 2003년 10월에야 노무현 정부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했고, 대통령이 직접 제주를 찾아 잘못된 공권력 행사에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노력으로도 희생자와 유족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전과자 신분에 고문과 옥살이로 인한 세월은 여전히 보상받지 못했다. 이제 ‘4.3특별법’ 전부개정안이 공포됨으로써 추가 진상조사와 희생자 특별재심, 위자료 등 특별한 지원방안을 통해 ‘4.3’의 진실이 추가로 밝혀지고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상처 치유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제73주년 4.3희생자추념식에서 다음과 같은 추념사를 하였다.

“군과 경찰의 진정성 있는 사죄의 마음을 희생자와 유가족, 제주도민들께서 포용과 화합의 마음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국가가 국가폭력의 역사를 더욱 깊이 반성하고 성찰하겠다는 마음입니다. … 제주도민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죽음과 이중 삼중으로 옭아맨 구속들이 빠짐없이 밝혀질 때, 좋은 나라를 꿈꿨던 제주도의 4·3은 비로소 제대로 된 역사의 자리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 정부는 한 분 한 분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배상과 보상을 통해 국가폭력에 빼앗긴 것들을 조금이나마 돌려드리는 것으로 국가의 책임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지나간 설움을 다 풀어낼 수 없겠지만, 정부는 추가 진상조사는 물론, 수형인 명예회복을 위한 후속 조치에도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배상과 보상에 있어서도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4·3 평화공원 내 기념관에는 여전히 이름을 갖지 못한 백비가 누워있습니다. 제주도에 일흔세 번째 봄이 찾아왔지만, 4·3이 도달해야 할 길은 아직도 멀리 있습니다. 비어있는 비석에 어떤 이름이 새겨질지 모르지만, 밝혀진 진실은 통합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고, 되찾은 명예는 우리를 더 큰 화합과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이끌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마침내 제주도에 완전한 봄이 올 때까지 우리 모두 서로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읍시다.”

‘4.3’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되는 추념사였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 누워있는 비석 ‘백비’의 안내문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적혀 있다. 앞으로 4.3의 남은 과제 중 하나가 올바른 이름을 찾는 일이다. 정명(正名)이란 이름[名]과 실재[實]가 부합된 것을 말한다. 1948년을 전후하여 제주섬에 있었던 제주역사, 우리역사, 세계역사에 기록할 만한 엄청난 사건, 그것을 우리는 그냥 숫자로 ‘4.3’이라 부르고 있다. 한동안 제주사람들은 그것을 ‘ᄉᆞ태(사태)’라고 하였고, 공식적으로는 ‘제주4.3사건’이라 하였으며, 일부에서는 ‘제주4.3민중항쟁’이라 하였고, 또 누군가는 ‘반란’, ‘폭동’, ‘봉기’, ‘집단학살(genocide)’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아직 그 어느 것도 흡족하지가 않다.

정부가 공식 채택한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4.3’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봉기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4.3’의 적절한 이름을 찾기에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사건의 실상을 이야기하려면, 거시적 차원에서 사건의 맥락을 살펴야 하고, 그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혀야 하며, 그 사건을 촉발시킨 작은 사건들의 인과관계도 어느 정도 밝혀야 한다. 만일 일제강점이 없었더라면, ‘4.3’도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8.15해방이 단순한 광복절이 아니고, 명실상부한 자주독립일이었다면 ‘4.3’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연합군의 힘을 빌려 일제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고,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기준으로 이남과 이북을 장악하여 그들의 입맛에 맞는 정부를 만들려 경쟁하였다.

‘4.3’은 미군정기에 시작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까지 7년 6개월 넘게 이어진 사건이다. 미국과 소련은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아에서 자신들의 이념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한반도를 분단시켰다. ‘4.3’은 남북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와 우리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것을 막고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의 꿈을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4.3’을 이야기하려면, 그 기점이라 할 수 있는 1947년 3.1절 기념대회부터 고찰해야 한다. 당시 3.1절 기념대회는 각 읍면별로 치러졌고, 제주읍, 애월면, 조천면 주민 3만 여 명이 제주북교에 운집하여 “3.1정신 계승, 외국군철퇴, 외세간섭배제, 조국의 조속한 통일독립”을 주장하였고, 집회가 끝난 후 통일촉구 가두시위 도중 무장경찰의 총격으로 민간인 6명이 사망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수습보다는 시위주동자 검거에 주력하였고,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민관총파업으로 이어지자 제주도를 ‘빨갱이섬(레드 아일랜드)’로 단정하였다. 그리고 경찰과 서청의 가혹한 탄압에 저항하고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 반대하기 위해 1948년 4월 3일 무장대가 봉기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무자기축(1948~1949년) 집단학살로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남북갈등이 극에 달한 한국전쟁 시기에 제주도민은 다시 한번 광풍의 희생양이 되었다.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교수 ⓒ제주의소리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교수 ⓒ제주의소리

8.15해방 직후는 바람직한 자주독립국가를 꿈꾸며 다양한 이념들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미소 두 강대국이 한반도를 분할 지배하고, 그에 편승한 정치 권력이 자주독립과 통일의 꿈을 좌절시켰으며, 그에 대한 저항세력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4.3’은 소극적으로는 반외세, 반독재, 반분단 투쟁이요, 적극적으로는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항쟁이었다. 제주도민은 한반도가 분단되는 과정에서 희생양이 되었고, 한민족은 미국과 소련이 동북아를 지배하려는 과정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4.3’으로 희생자와 유가족과 제주도민이 입은 상처들이 너무 크기에 보다 적절한 바른 이름을 찾기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4.3’의 바른 이름을 찾기 위해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가야 한다. ‘4.3’에 대한 바른 이름을 찾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어쩌면 남북이 하나가 된 다음에라야 제대로 된 이름을 찾게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윤용택 논설위원·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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