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실-고현주 4.3 사진집 ‘기억의 목소리-사물에 스민 4.3이야기’ 발간

흑백 사진 한 장, 손에 낀 은반지, 구식 재봉틀. 

사물에 담긴 한스러운 제주4.3 이야기를 허은실이 쓰고 고현주가 찍었다. 사진집 ‘기억의 목소리’(문학동네)다. 

‘기억의 목소리’는 4.3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고현주 사진작가가 유품 사진을 찍고, 허은실 시인이 인터뷰를 기록하고 시를 썼다. 유족들이 간직하고 있는 4.3 관련 유품 22점과 수장고에 보관된 신원불명 희생자의 유품 5점까지, 총 27점의 사물을 중심으로 만나는 제주4.3의 이야기다. 

출판사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희생자들이 실제로 사용하고 유가족들이 간직해온 소소한 사물을 통해 4.3의 역사와 개인의 삶을 되짚는다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쌀 포대로 안감을 댄 저고리, 사후 영혼결혼식을 치른 젊은 남녀의 영정 사진, 토벌대를 피해 산에서 지낼 때 밥해먹은 그릇,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렸던 아버지의 성경책 등. 70여 년 전 당시 제주 곳곳에서 말없이 참혹한 현장을 지켜봤던 사물들이다. 책은 수십 년 세월의 풍파를 거쳐 보존된 유품을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4.3 희생자의 일상을 조명하며 아픈 역사와 사람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4.3 이후에 딱 15년 동안 소, 말 다 장만하고 밭 두 개 해놓고 돌아가셨다. 우리 어머니 죽을 때까지 이 비녀로 쪽쪘어.

- 안순실 유족 인터뷰, 113쪽

어머니가 몰래 내려와 숨겨둔 양식 갖고 올라가고 한 4~5개월. 산에서 내려와서도 이걸로 중학교 때까지 밥해먹었어요. ... 이런 유품들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애달픈 생각 밖에 안들죠. 저도 이제 일흔아옵인데 잊어버려야죠. 뭐......

- 양남호 유족 인터뷰, 129쪽

그날 북촌마을 전부가 타고 그나마 안 탄 집이 우리집이랑 두 집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다 우리집에 모여 밥을 해서 나눠먹었어요. 어머니는 나중에 돌아오셨는데 어머니의 손과 입고 있던 갈중이, 그리고 검은 고무신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아버지 시신을 확인하고 왔다고, 손만 대강 씻고 부엌으로 들어오며 하셨던 말이 기억나요. “덜 서러워야 눈물도 나지. 먹게, 먹게.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른다. 한번 배불리 먹자. 그릇에 밥 떠놔라.”

- 이재후 유족 인터뷰, 173쪽

내가 제일 억울한 거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바다에 던져진 거. 그냥 마른땅에서 죽여버렸으면 낫잖아. 바다만 보면 생각나. 바람 불어 파도치면 머리가 이 돌에도 가 다치고, 저 돌에도 가 다치고, 또 막 물결쳐 다니면서 어딘지도 모르고 어떵할 거여. 그 물에 끌려다니며 몇 번을 죽었겠어. 큰 고기들, 상어 같은 거 보면 ‘저것들이 우리 어머니 다 먹어버렸겠지’ 그래서 내가 멸치고 뭐고 바당고기를 일절 안 먹어.

- 김연옥 유족 인터뷰, 197쪽

제주4.3 73주년 즈음하여 발간된 이 책은 그동안 (사)제주국제화센터(대표 송정희)에서 4.3 시리즈로 발행한 ‘기억의 목소리 1~2’를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향후, 서울과 제주 등 고현주 사진작가의 ‘기억의 목소리’ 사진 전시회와 출간 북콘서트 등이 예정돼 있다. 

고현주 작가는 2018년부터 4.3 유품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 ‘기억의 목소리’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4.3의 역사가 당대의 집단기억으로, 문화적·시대적 상징으로 자리잡는 계기를 만드는 데 예술가로서 작은 역할이나마 하고자 한다. 일곱 번의 개인전과 국내외 다수 기획전에 참여했다. 지은 책으로 ‘꿈꾸는 카메라’가 있다.

허은실 시인은 2018년 제주로 이주한 후 4.3 관련 증언을 기록하며 시로 쓰는 일을 이어오고 있다. 문명과 역사, 체제와 이념의 폭력 속에서 음소거된 목소리를 듣는 일, 문서가 누락한 이름들을 부르는 작업에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쓰려 한다. 지은 책으로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산문 ‘내일 쓰는 일기’, ‘그날 당신이 내게 말을 걸어서’,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이 있다.

출판사는 "사진작가는 사진 찍기 전 기도를 했고, 시인은 시 쓰기 전 삼배를 올렸다. 유족과 유품을 마주할수록, 사건을 직접 겪지 못한 후손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고 감당하기 힘든 진실의 무게에 기록하는 자의 두려움은 더 커졌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4.3의 참혹함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생존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고, 한 명이라도 더 만나지 않으면, 한마디라도 더 듣지 않으면 4.3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기회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더 가까이, 더 깊이 아픈 역사를 추적했다"면서 "그렇게 다시 봄이 오는 제주에서 가장 작은 목소리를 기억하는 일에 함께해달라고, 이토록 소중한 평화의 가치를 오래오래 잊지 말자고, 4.3의 피와 눈물이 밴 사물들은 외치고 있다"고 소개했다.

252쪽, 문학동네, 1만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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