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게, 고치가게] (4) 구좌읍 세화리 기름 빻고 떡 짓는 ‘세화제분소’ 라이스나이스

2021년 창간17주년을 맞은 [제주의소리]가 오랜 기간 제주 곳곳을 지키며 이어온 공간과 인물을 소개하는 연중 기획 [이어가게, 고치가게]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점포(老鋪)와 그 속에 숨은 장인(匠人)들을 소개합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미래의 나침반입니다. 제주의 기억을 이어가고 앞으로도 함께 지켜감으로써, 제주의 미래를 같이 가꾸고 조명하자는 취지입니다.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이야기는 제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이들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제주의 오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춧돌이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세화제분소'. 건물 한 켠에는 외손녀가 운영중인 팝업스토어 '라이스나이스'가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세화제분소'. 건물 한 켠에는 외손녀가 운영중인 팝업스토어 '라이스나이스'가 있다. ⓒ제주의소리

새벽 여섯 시, 오늘도 해 뜨기 전 일어나 문을 연다. 고소한 냄새를 따라가면 막 기계를 빠져나온 유채기름이 보이고, 모락모락 김이 솟는 뜨끈뜨끈한 가래떡이 반긴다. 

예약된 물량을 지키기 위해 아침에는 쉴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 할머니와 외손녀는 익숙하다는 듯이 고운 가루를 기계에 넣고, 떡을 빚고 문양을 낸다. 할아버지는 회전솥에 유채열매를 볶아내고, 기름을 내린다. 셋은 눈빛만으로 서로의 역할을 완벽하게 분담해낸다.

이른 봄, 가족이 함께 캐낸 향긋한 쑥은 방앗간에 직접 제분한 찹쌀을 만나 제주쑥인절미로 탄생했는데 고소함이 일품이다. 달콤한 딸기잼설기, 오레오설기 그리고 호두피칸강정, 체다치즈설기와 같은 독특한 매력을 뽐내는 떡들은 색도 곱다. 이 집의 시그니쳐 푸드라고 할 수 있는 통팥앙금떡은 쫄깃함과 말랑말랑함을 절묘하게 섞어놓은 그 균형이 예술이다. 볶은콩가루, 보리개역(제주보리미숫가루)도 만날 수 있다.

동이 틀 무렵 한 백발의 여성이 들어와 떡 몇 개를 주문했다. 30년 넘은 단골이라고 한다. 계속 오는 이유를 물었더니 “여기 떡이 너무 좋아서, 그리고 사장님이 좋아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1980년대부터 제주 구좌읍 세화리 ‘세화제분소’에서 이어져 온 아침 풍경이다. 이 곳을 지키는 이들은 일흔여섯 김여종씨와 고매욱씨. 이 부부의 딸과 스물아홉 외손녀 강이란씨를 거쳐 3대가 잇는 방앗간이다.

세화제분소를 운영 중인 고매욱-김여종 부부와 외손녀 강이란 씨(사진 맨 오른쪽). ⓒ제주의소리
세화제분소를 운영 중인 고매욱-김여종 부부와 외손녀 강이란 씨(사진 맨 오른쪽). ⓒ제주의소리
세화제분소에서 볼 수 있는 재료와 떡들. (맨 위부터) 인절미와 절편에 들어가는 쑥, 통팥앙금떡, 가래떡. ⓒ제주의소리
세화제분소에서 볼 수 있는 재료와 떡들. (맨 위부터) 인절미와 절편에 들어가는 쑥, 통팥앙금떡, 가래떡. ⓒ제주의소리

뜨거운 열기 앞에서 보낸 하루하루

1966년 스물한살 동갑내기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원예작물과 유채농사를 하며, 해녀로 물질을 하며 5남매를 낳고 15년간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냈다. 부부는 ‘나오는 것이 별로 없고 힘들기만 했다’고 이 시기를 회상한다. 아이들 공부를 위해서라도 직업을 바꿔야 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다.

조금씩 모은 돈으로 1982년 구좌읍 세화리 주유소를 마주본 이곳에 ‘세화제분소’를 열었다. 착유소이자 방앗간이었다. 곡식을 갈고, 떡을 만들고, 기름을 짜는 일은 늘 뜨거운 열기와 마주하는 게 일상이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힘들지 않았다. ‘유채를 갈아 팔면 돈도 좀 만질 수 있던 시기’였다. 유채기름을 내리고 나면 남은 유박도 쏠쏠한 벌이가 됐다.

“1980년대에는 구좌 보건소 근방에 세화오일장이 있었어요. 장날에는 유채기름 빻으려고 손님들이 줄을 짓고 앉아 있었어요.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어질 정도로 손님이 많았어요.”

조금씩 조금씩 모으는 재미가 생겼다. 아이들이 하나둘 커가면서 보람도 커졌다. 아이들이 어엿한 성인으로 자랐을 무렵, 이들의 삶은 뜻밖의 고난을 맞는다.

1994년, 남편 김여종씨는 마흔아홉의 나이에 비인강 암 4기를 선고받았다. 비행기에서 귀가 멍했던 것이 병의 징조였다. 

술 담배를 끊은지가 오래됐고, 매일 아침 조기축구회에서 운동을 하면서 건강관리를 했었기에 믿기 힘든 결과였다. 수술도 힘들다고 했다. 앞으로 2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설명을 받았을 때 아내 고매욱씨는 기절까지 했다고 한다. 

투병생활은 고단한 현실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돈은 벌어야 했기에 아내는 방앗간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일을 했고, 남편은 혼자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는 이때 방사선 치료로 인해 청각의 상당부분을 잃었다.                                           

그는 좌절하는 대신 운명의 파도를 거슬러 더 활발하게 활동하려 애썼다. 암투병 중에도 마을 이장 일을 맡아 수해 복구를 위해 뛰어다닌 이야기가 신문 1면에 실리기도 했다. 

김여종 씨가 유채기름을 만들고 있다. 좋은 유채열매를 고라, 회전솥에서 잘 볶은 뒤, 기계에서 갈아내고, 다시 끓여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성이 필요한 작업이다. ⓒ제주의소리
김여종 씨가 유채기름을 만들고 있다. 좋은 유채열매를 고라, 회전솥에서 잘 볶은 뒤, 기계에서 갈아내고, 다시 끓여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성이 필요한 작업이다. ⓒ제주의소리
세화제분소의 탄생과 함께한 회전솥. 할아버지 김여종 씨가 직접 개발했다. 그는 웬만한 기계 수리는 스스로 가능하다. ⓒ제주의소리
세화제분소의 탄생과 함께한 회전솥. 할아버지 김여종 씨가 직접 개발했다. 그는 웬만한 기계 수리는 스스로 가능하다. ⓒ제주의소리

그의 인생시계는 계속 돌아갔다. 덤덤히 암과의 싸움을 조금씩 이겨냈다. 27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일찍 일어나 방앗간 기계를 돌리며 일상을 살아낸다. 2년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시기를 생각하면 기적이다.

그는 글쓰기로 투병의 괴로움을 이겨냈다. 그런데, 이 글이 주는 울림은 그를 새로운 글로 이끌었다. 우연한 계기로 필력을 인정받아 등단한 것이 2007년. 투병에서 느낀 감정과 생각들은 수필집 ‘덤 인생’과 2015년 시집 ‘덤 인생의 나날’로 재탄생했다. 여기에는 삶에서 느낀 허무함과 무력감, 후유증을 이겨내면서 버틴 기억들, 다시 가족과 함께 행복을 찾은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 '암'이란 친구가 놀러왔다가 몇 년을 같이 다니며 /옥신각신 다퉈가며 새로운 인생항로를 가르쳐줬다... 길은 자꾸 새로 생겨난다 /처음 걷는 길은 협착하면서도 재밌고 아름답다 /앓고 나니 느껴 보지 못한 무수한 많은 길들 밖으로 나를 내몬다 /보는 길이 달랐고 가는 길의 느낌이 다르다 /어디로 가야할 지 뚜렷한 목표도 없다 /멈추거나 쓰러지면 안되기에 내 마음의 지시대로 갈 뿐이다/...’ (‘마음속 길’ 중에서)     

암을 만난 그는 수필가이자 시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느낀 것은 가족의 소중함이다. 그는 연신 “마누라에게 참 고맙고 미안하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세화제분소에서 만든 체다치즈설기와 딸기잼설기(사진 왼쪽), 오레오설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노련미는 외손녀의 아이디어와 만나 새로운 떡을 탄생시켰다. ⓒ제주의소리
세화제분소에서 만든 체다치즈설기와 딸기잼설기(사진 왼쪽), 오레오설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노련미는 외손녀의 아이디어와 만나 새로운 떡을 탄생시켰다. ⓒ제주의소리

할머니의 할아버지의 기억, 손녀가 잇다

세화제분소 한 켠에는 라이스나이스라는 이름의 작은 팝업스토어가 있다. 이들의 외손녀 강이란 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영양사로 일하던 강씨는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땀을 흘린다. 

대량으로 떡을 주문하는 집이 줄었기에 세화제분소의 변화는 불가피했다. 이때 손녀 이란씨의 존재가 빛을 발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지닌 전통의 기술에 그의 아이디어를 입혔다. 소포장으로 새로운 퓨전 떡을 만들고 온라인 스토어를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손녀는 “오메기떡 말고도 제주에서 구매할 수 있는 특별한 떡을 만들어보자”는 생각 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염려 반이었다.

“저는 정량화돼 있는 레시피를 중요시하는데, 할머니는 40년 동안 하셨던 분이니 눈대중으로 하시는 거예요. 그게 좀 힘들었는데 이제는 맞춰가고 있어요. 제가 떡을 만들고 싶으면 할머니의 노하우를 합칠 수 있어요. 여기서 제일 잘나가는 통팥앙금떡도 그렇게 나왔어요.”

도내 카페에 음료로 나가는 보리개역, 인절미, 그리고 시그니쳐푸드라고 할 수 있는 통팥앙금떡까지 조부모와 손녀의 협업은 점점 힘을 발휘하고 있다. 강이란 씨는 “빨리 이 가게를 안정화시켜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 이상 고생안하고 앉아서 아이디어만 줄 수 있는 가게”를 만드는 게 목표다.

고매욱 씨가 외손녀 강이란씨와 떡을 빚고 있다. ⓒ제주의소리
고매욱 씨가 외손녀 강이란씨와 떡을 빚고 있다. ⓒ제주의소리

외손녀의 동행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일상은 든든한 힘을 얻었다. 할머니는 손녀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더 밝고 커졌다.

“시에서 (방앗간)하지 말고 할망 밑에 와서 10년만 배워서 하라고 했어. 작년부터는 요것이 인터넷에 올리고 하니까 무진장 잘나가는 거라. 게난 나는 몸이 괴로워도(할머니는 허리가 좋지 않다) 우리 손녀 하는 거 보면 너무 아꼬와서, 돈 버는 재미로... 맘이 막 지꺼져. 이젠 내가 죽어져도 손주가 잘 하겠구나.”

그러나 아직 완전히 바통을 넘겨줄 때는 아니다. 두 노부부는 손녀가 완전히 자리잡기까지, 본인들의 노하우와 기술을 온전히 전수해주는 중요한 임무가 남았다고 했다. 1980년대부터 가족의 버팀목이자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었던 세화제분소에 새로운 기억이 고소하게 쌓이고 있다.

“나 생각으로는 몸만 움직여지면 앞으로 10년은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뭐 떡은 못하더라도 손주가 하는 일은 영 이녁이 알아지니까. 몰라, 90살까지 살아지면 할 수 없지. 죽지 않고 살아지면 할 수도 있지. 100살까지도 할 수 있어. 저번에 전국노래자랑에 나온 할망이 102살이더라고. 게난 마음이 노력해질 때까지는 해야지. 죽는 날까지 노력해야지. 손주가 떡하고 바빠하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잖아. 저것이 여기서 오래 하겠다고 하면 할 때까지 내가 뒷받침 해줘야지, 다른 건 몰라도..”

세화제분소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라이스나이스 SNS 계정(위)과 떡을 구매할 수 있는 온라인스토어. 외손녀 강이란 씨가 아니었으면 구축할 수 없던 판로였다. 할머니는 온라인 판매의 위력을 체감하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제주의소리
세화제분소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라이스나이스 SNS 계정(위)과 떡을 구매할 수 있는 온라인스토어. 외손녀 강이란 씨가 아니었으면 구축할 수 없던 판로였다. 할머니는 온라인 판매의 위력을 체감하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제주의소리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