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98) 김현화, 민중미술, 한길사, 2021

김현화, 민중미술, 한길사, 2021. 출처=알라딘.

"민중이 주체가 되는 세상이 이상향이 아닌 구체적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민중문화운동이 순수한 문화적 유희 속에 빠져들 수만은 없었다. 이데올로기적 권력투쟁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중미술도 군사정권과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군사정권의 전복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다. 민중미술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영원히 등장하지 않을 것 같은 대규모 집단 문화정치이자 미술 하나만으로 시대현실을 변혁하고자 한 이례적인 미술운동이었다.“

저자 김현화는 이렇듯 민중미술을 집단의 문화정치이자 현실변혁의 미술운동으로 규정한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라는 한국현대사 최고의 사회변혁운동기에 나타난 문화정치의 산물이다. ‘민중미술’이라는 간명하고 선명한 제목에 ‘1980년대, 문화정치의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이 책은 의제 기반으로 민중미술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저자가 언급한 바대로, 민중미술은 “1980년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분단과 외세 극복을 위한 민족주의 열풍, 사회계급의 평등에 대한 욕구가 만들어낸 시대적 산물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저자는 노동과 자본, 식민과 분단, 민족, 일상, 현장, 여성 등의 사회과학적인 구조틀을 세워놓고 민중미술의 갈래를 차분하게 정리해나간다. 첫 번째 의제는 민중미술의 출발을 알리는 ‘소집단의 결성: 민중이란 이름으로’이다. 2장은 ‘리얼리즘의 부활: 기록, 비판, 현실변혁을 외치다’이다. 1980년 전후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을 살피며 민중미술의 배경과 출발을 들여다본다. 

“〈출근〉과 〈라면 식사〉와 같은 작품들은 척박하고 열악한 현실을 떠올리게 하지만 투쟁성보다는 낭만적인 향수를 먼저 느끼게 한다. “이에 대해 미술가가 노동자적 정서를 직접 체험하지 않고 관념에 근거하여 표현하기 때문이라는 반성도 제기되었다. ... 홍성담은 초기 작품(〈라면 식사〉)에서 볼 수 있듯 낭만적인 정취를 느끼게 하는 감성을 보여주지만 5ㆍ18민주화운동을 겪은 후 투쟁에 앞장서게 된다. 이처럼 홍성담이 낭만적 정취, 현실비판, 현실변혁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하는 단계가 바로 “민중미술의 발전단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성담에 대한 저자의 언급은 관념적 낭만주의 예술가에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전투적 신명론을 내세운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3장에서 10장까지는 각 장의 의제가 나온다. 자본의 문제가 앞선다. ‘노동: 사람됨을 위해’, ‘땅: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위해’, ‘물질적 세상: 지옥도地獄圖가 되다’, 민중미술이 사회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1980년대라는 시대의 변화를 예술가의 눈으로 읽어내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의 유신 체제하에서 억눌렸던 감성과 이성을 분출한 예술가들은 신군부의 엄혹한 독재 아래서도 흑백에서 컬러로, 침묵에서 발언으로, 금욕에서 소비로 변화해가던 1980년대의 자본의 문제를 현실주의 감각과 어법으로 펼쳐나갔다. 

민족 문제가 뒤를 잇는다. ‘통일: 우리 하나됨을 위해’, ‘반미와 반일: 외세 없는 세상을 꿈꾸며’에서 저자는 1980년 광주학살의 진실을 파헤치며,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나선 예술가들의 질문과 비판에 주목한다. 한국의 분단문학이 그러했듯이,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에 참가한 미술가 다수도, 분단상황에 주목했다. 분단과 통일을 주제로 한 작품 전시를 열었으며, 단건이 아닌 연작 창작과 전시로 문제의식을 키워갔다. 분단의 배후에 존재하는 일본과 미국의 존재에 대한 비판 또한 격렬하게 나타났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제국과 식민의 본질과 현상을 갈파한 예술가들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민중미술은 외세 침입에 저항하고 민족의 통일을 추구하기 위해 ‘반미’와 ‘반일’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켰다. 반미와 반일은 미국을 위시한 주변 강대국의 밀착된 이해관계 속에서 민족의 운명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촉발했으며 식민지성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던진다. ... 일장기 안에 있는 붉은 원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민중의 모습은 우리의 역사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침략과 수탈의 연속이었음을 알린다.”

애도와 진혼, 일상과 현장, 여성과 현실 등의 주제들이 세 번째 의제 묶음이다. ‘민중의 원귀?鬼에 바치다’, ‘민중의 일상과 현장 속으로’, ‘여성의 현실에 눈뜨다’ 등 1980년대를 살아낸 민중의 삶과 죽음과 투쟁, 특히 현실에 눈떠가는 여성들을 다룬 미술에 대한 주목이 각별하다. 1990년대에 한국미술계에 찾아온 일상성의 문제는 기실 1980년대에 민중미술가들에게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것은 현장성과도 맞닿아있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일상과 현장은 민중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는 생활정서와 민중투쟁의 시대정신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 민중은 소외와 억압, 소수자, 여성 등의 범주로 확장하는 주체들이었다. 

에필로그는 ‘전시장 복귀와 제도권 미술로의 진입’이라는 장으로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15년>의 결여와 결핍, 의미와 가치, 한계와 성과 등을 다룬다. 1980년에서 1994년까지의 민중미술운동 15년에 대하여 아직도 많은 이들의 생각이 엇갈린다. 어떤 사람들은 1994년의 그 일을 민중미술의 장례식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민중미술의 정신은 1990년대 말까지 지속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2000년 이후에도 여전히 민중미술가들의 21세기 버전의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하려면 우리에겐 좀 더 많은 역사적 거리가 필요할 테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미덕과 같이 민중미술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연구를 공론장에 투척하는 진지한 성찰은 꾸준하게 이어질 것 같다. 비록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과 시민과 대중들은 더 이상 민중이라는 이름을 호명하지는 않지만, 격동의 1980년대를 뜨겁게 살아갔던 사람들과 함께 했던 미술운동인 민중미술은 역사를 구성하는 여러 조각 중의 하나로 기록하고 기억할만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역사를 통하여 과거를 성찰하고 그 성찰이야말로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는 지혜의 원동력이라는 점을 되새긴다.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

현(現)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미술평론가. 한국큐레이터협회장.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장. 예술과학연구소장, 지리산프로젝트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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