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왓 칼럼] (29) 민주노총 제주본부 본부장 임기환

편견으로 무장한 이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여전히 반인권적 발언과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 일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존재 자체로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어선 안됩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난민 등 대상은 다르나 일상 곳곳에서 여전히 차별이나 혐오, 폭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인권문제에 천착한 '인권왓 칼럼'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인권활동가들의 현장 목소리를 싣습니다. [편집자 글]

제주에서 건설 노동자로 10년 넘게 일해 온 김 씨는 작업 과정에서 분진과 알 수 없는 유해 물질들이 작업복에 묻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족이 함께 쓰는 세탁기에 작업복을 돌린다.

일터에 일용직 건설 노동자가 이용할 수 있는 세탁기가 있을 리 만무하고, 전문 세탁소에 맡기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일용직 노동자에겐 언감생심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족들 옷과 따로 세탁하기 하지만, 유해 물질이 묻어 있는 작업복이 가족들의 건강을 해칠까 봐 항상 걱정이다. 부인과 아이의 피부에 문제라도 생기면 덜컥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이 같은 현실은 2005년 일본 열도를 뒤 흔든 ‘구보타 쇼크’를 떠오르게 한다. ‘구보타’는 석면이 함유된 건축자재를 생산하던 기업으로 노동자들과 인근 주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석면 비극을 일으켰다. 

특히, 석면이 붙어 있던 작업복을 세탁하던 아내 4명과 아빠의 작업 마스크를 쓰고 놀던 자녀가 석면 노출로 사망해 일본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제주 지역의 많은 노동자들이 제조·정비와 건설, 농업 부문까지 화학 물질과 용제, 페인트도장, 용접 등의 작업 과정에서 유해 물질에 노출되거나 접촉하기 쉬운 사업장에서 일을 한다.

산업안전보건법령에는 세탁, 휴게, 세면·목욕, 탈의·수면 시설 등 위생 시설을 사용자가 사업장내에 설치 마련하도록 하지만 제주의 사업장 10곳 중 9곳이 10인 미만의 중소영세사업장인 것을 감안하면 대부분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설령 설치되었다 하더라도 시설이 낙후해 많은 노동자들이 작업복을 입은 채로 출퇴근한다. 또한 설치된 세탁기 역시 작업복 전용 세탁기가 아닌 가정용이라 대부분 집에서 세탁을 한다.  

이렇게 집으로 가져가는 유해 물질에 오염된 작업복은 그 물질의 특성에 따라 장시간에 걸쳐 축적되기 때문에 노동자 자신은 물론 가족의 건강까지 위협한다. 또한 가정용 세탁기는 유해물질을 제대로 제거할 수도 없다.

결국 작업복 세탁은 노동자만 아니라 노동자 가족의 건강과 복지에 직결되어 있다.

출처=픽사베이.
작업복 세탁은 노동자만 아니라 노동자 가족의 건강과 복지에 직결되어 있다. 출처=픽사베이.

이미 사업을 시작한 지역도 있다. 지난 2월 전라남도는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운영 지원조례’를 제정하였고, 경남 김해와 광주 하남에 노동 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해 작업복만을 전문적으로 세탁·수선하는 노동자 작업복 공동 세탁소를 설치·운영하고 있다.

제주에서도 법률과 조례에 근거해 노동자 작업복 공동 세탁소 설치가 가능한 상황이다.

‘근로복지기본법’ 제28조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근로자를 위한 복지시설의 설치·운영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근로자 권리보호 및 증진을 위한 조례’ 제4조는 ‘도지사는 근로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근로자가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근로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민주노총제주본부 역시 지난 3월 25일 대의원 대회를 통해 ‘제주 노동자 작업복 공동세탁소’ 설치 추진을 결의하고, 제주특별자치도와 의회에 지원 조례 제정 등 설치를 위한 노정 협의를 요청할 계획이다. 

작업복은 노동자에게 유해하고,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자신의 몸을 지켜줄 방패와 같다. 안전하고 깨끗한 작업복은 노동자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다.

중소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제주의 노동자와 그 가족, 우리 이웃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도와 의회는 물론, 제주 공동체가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 민주노총 제주본부장 임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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