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소년으로, 극작가로, 시인으로, 그리고 제주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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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열 작가 산문집 ‘달보다 먼 곳’ 발간

바다 소년

“집안의 가난을 어느 정도 눈치챈 때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낮은 목소리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다툼 소리를 들은 것이다. 파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밤이었다. …… 물마루에 넘실대는 별빛을 본 것이 아마 그 무렵이었을 거다. 자세히 보니 별들이,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고 뭇별들이 아득한 물마루에서 넘실대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지만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그 자리에 있는 별들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별들의 고향이 바다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 바다에 스민 기억들, 62쪽

“그림을 그리겠다는 아이들이 많아서 나더러 운문 부문으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시’라는 것은 국어책에서 본 동시 몇 편이 고작인데,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죄 없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창이 조화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창을 통해 바깥을 보고 싶으면 바깥 풍경이 보이고 비스듬히 창을 보면 나를 포함한 교실 안 풍경이 보였다. 어떤 때는 교실 안과 밖의 풍경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했다. 순간 어떤 영감이 휙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 내 문학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15쪽

청춘과 마당극

“무슨 수를 쓰든 제주를 벗어나고 싶었다. 출세를 하고 싶었다. 결국 출세에 실패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제주를 증오하는 일, 제주를 버리지 못한 나를 저주하는 일을 빼곤 아무것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적이었고 그 누구와도 맞짱을 뜰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술병을 쓰러뜨렸고 그때마다 문명에 의해 처녀를 침탈당한 탑동으로 갔다. 속엣것들을 남김없이 바다에 뿌렸다. 내 유년을 기억한 바다는 군소리 없이 내 주정을 받아주었고 나는 그 곁에서 새벽을 맞이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편의 시가 내게 왔다.”
- 내 문학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66쪽

“비록 등단은 했지만 시 쓰기 보다는 마당극판에서 주로 놀았다. 시를 써도 발표할 지면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기도 했지만 대중들과 직접 맞대면하는 마당극판이 너무 좋았다. 극단 ‘수눌음’이 당시 첨예한 시국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되고 어떻게든 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1987년 6월항쟁 이후 극단 ‘한라산’을 만들게 되었는데 지금도 나는 ‘한라산’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 무언가 아슴하게 보이는 날들을 위하여, 88쪽

“교사가 된지 5년 만이었다. ‘하고 많은 선생 중에 왜 하필이면 네가 쫓겨나야 하느냐?’면서 그 밤에 온 동네를 돌면서 전교조 합법화 서명 용지를 가득 채워 오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명치끝이 아려온다.”
- 무언가 아슴하게 보이는 날들을 위하여, 89쪽

“오랜만에 백사장에 앉아 잔을 주고받다가 막걸리처럼 적당히 발효된 그의 절창 ‘대니 보이’를 들으면서 천천히 취하고 싶다.”
- 심방 정공철을 말하다, 114쪽

詩와 4.3 그리고 제주

“시를 본격적으로 써야겠다고 다짐한 것이 이즈음이다. 지금 시를 쓰지 못하면 영원히 시를 접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시편들이 소위 운동성을 전제로 한 ‘거리의 시’ 혹은 ‘현장의 시’가 대부분이었다면 이제는 운동성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문학작품으로 다른 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어떤 절박함이 밀려왔다.”
- 무언가 아슴하게 보이는 날들을 위하여, 91쪽

“나는 내 언어를 교과서에서 배웠다. 모르는 언어가 눈에 띄면 표준이 되는 언어만 실려 있는 국어사전에 기댔다. 그러나 어머니는 당신의 언어를 삶에서 체득했다. 바닷물에 절고 바람에 씻겨 오로지 알갱이만 남은 언어로 어머니는 울고 웃고 사랑하고 또 싸웠다. …… 문학에 뜻을 두고 제주의 속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어머니의 언어가 귀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 언어의 소중함을 알았다.”
- 섬에서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일, 105쪽 

“여러분들이 커서 다시 제주를 찾게 된다면 이 점을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제주는 참 아름다운 섬이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는 엄청난 상처가 지금도 치유되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 문학으로 재기억되는 젊은 4.3, 263쪽

“그런 방에서 바라본 수평선 위로 어렴풋이 탐라국 시절이 떠오른다. 몽고 100년 지배의 섬, 탐라가 지나가고 최영이 지나간다. 삼별초 항쟁의 김통정이 지나간다. 반외세, 반봉건 싸움의 이재수가 스쳐 지나간다. 일제 36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미군정에 의한 제주4.3의 쓰라린 역사가 아련히 떠오른다. …… 그 아픔 위에 강정 해군기지가 겹친다. 평화의 섬에 해군기지라니. 해군기지의 섬이 세계7대 자연경관인가? 차이나 머니가 쓰나미처럼 섬을 덮친다. 어디를 가도 중국인 천지가 되어버린 섬. 어디 그뿐인가. 국제자유도시에 짜 맞추기라도 하려는 듯 영어마을 영어학교가 가슴 한복판을 헤집고 다닌다.”
- 시를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어느 시인을 생각한다, 292쪽

출처=알라딘.

제주작가 김수열의 신간 ‘달보다 먼 곳’(삶창)은 시(詩)가 아닌 여러 기회에 썼던 산문을 한데 모은 책이다.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제각각 다르지만, 전체 26편을 읽다보면 무근성 골목과 탑동 바다를 누비며 뛰어놀던 소년 김수열이, 어느덧 후배와의 인터뷰에서 조언을 풀어놓는 원로의 길을 밟아가는 한 편의 일대기가 그려지는 신기한 경험을 마주한다.

‘달보다 먼 곳’은 편안한 문장 속에 저자의 진솔한 삶, 그리고 제주 가치에 대한 고민이 종이 한 장처럼 붙어있다. 글이 술술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 문학과 제주를 나름 진지하게 고민해온 김수열의 지난 세월이었기에 가능하다.

박정근 사진 작가의 전시 리뷰, 모리셔스와 콜롬비아 여행기, 서평(탐라 기행, 표해록, 탐라직방설, 눈물 속에서 자라난 평화), 인터뷰 등 시인보다 '작가'로서 마주하는 구성도 반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때 그 글을 쓸 수밖에 없을 때의 제주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제주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오히려 더 망가진 채 황량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 작가의 말, 6쪽

김수열은 제주에서 태어나고 '실천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바람의 목례 ▲생각을 훔치다 ▲빙의 ▲물에서 온 편지 ▲호모 마스크스 ▲꽃진 자리(4.3시선집)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 ▲김수열의 책읽기 ▲섯마파람 부는 날이면 등이 있다. 제4회 오장환문학상과 제3회 신석정문학상을 받았다.

삶창, 336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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