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24) 보리밥, 자리 요리 / 김진경 베지근연구소장, 제주음식연구가

밥이 보약이라 했습니다. 바람이 빚어낸 양식들로 일상의 밥상을 채워온 제주의 음식은 그야말로 보약들입니다. 제주 선인들은 화산섬 뜬 땅에서, 거친 바당에서 자연이 키워 낸 곡물과 해산물을 백록이 놀던 한라산과 설문대할망이 내린 선물로 여겼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진경 님은 제주 향토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입니다. 격주로 '제주댁, 정지에書'를 통해 제주음식에 깃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글]

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노란 유채꽃과 분홍빛 벚꽃이지만, 봄의 절정을 알려주는 것은 꽃이 아니다. 연둣빛 순에서 시작하여 푸르른 청록색의 절정을 보여주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파노라마 같은 향연을 보여주는 보리, 지금 제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친근한 풍경이다.

뭍에서 보리가 제주 봄의 절정을 알려준다면, 바다에도 역시 제주의 봄을 알려주는 제철 생선들이 있다. 시장의 어물전에는 한창 옥돔과 고등어, 전갱이, 우럭, 황돔 등은 물론이요, 멜과 자리돔이 싱싱함을 가득 머금은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비단 생선들만 그러할까, 톳과 미역도 바다의 봄내음을 안고 좌판 위로 올라와 있다.

제주 사람들은 보리가 익어가는 시시각각의 변화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계절의 변화를 체감한다. 보리가 익어가면, 제주사람들은 이제 곧 산과 들에서 보리탈(산딸기)를 얻을 수 있음을, 보리콩(완두콩) 수확이 목전에 왔음을 인지하게 된다.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보리와 연결되어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바다에도 있다.

사진=김진경.
보리밭. 사진=김진경.
사진=김진경.
보리. 사진=김진경.

“자리돔은 보리철이 가장 맛있어. 보리수확이 끝나 가면 자리도 맛이 없지.”

이렇게 제주의 봄은 꽃으로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보리로 이어지고, 보리는 다시 제철 식재료들을 이어 준다. 제주에서 보리는 그야말로 봄을 알려주는 전령사와 같다. 그렇다면 제주 사람들은 언제부터 보리를 먹게 되었을까? 아니, 언제부터 제주의 보리가 제주사람들의 주식이 되었을까?

지금 제주의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수십년 전 까지만 해도 제주 사람들의 주식은 당연히 보리였다.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집은 반지기밥(솥의 반은 멥쌀을, 반은 보리를 넣어 지은 밥)을 먹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보리쌀조차 부족하여 보리쌀에 고구마, 무, 톳, 감자 등을 넣어 양을 늘린 밥을 먹었다.

몇 해 전, 경기도에서 내려온 친구에게 고구마를 넣은 보리밥을 해 준 적이 있었다. 늘 하던 대로 아무 의식 없이 고구마보리밥을 완성시켜 그 친구에게 내밀었는데 그 친구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나에게 말을 했다.

“아니 왜 이렇게 고구마를 크게 썰어요? 고구마가 계란 크기만큼이나 해요.”

난 그냥 어른들이 하는 대로 만들었을 뿐인데 그 친구의 눈에는 유난히 고구마가 커 보였나 보다. 친구의 어머니도 고구마밥을 가끔 해주시는데 이렇게 고구마를 크게 썰어 넣지는 않는다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또 이런 경험도 있다. 나는 제주를 대표하는 전통음식으로 톳보리밥을 만들어 종종 외지분들에게 자주 선보였었다. 그럴 때마다 양을 넉넉히 만들어 주위의 어른들께 영양식으로 드릴 요량으로 좀 챙겨드렸는데 70대 중반 즈음 되 보이셨던 한 어르신들이 나에게 되려 핀잔을 주셨다. 

이유인 즉 옛날 못 살았던 시절 이 톳을 넣은 보리밥을 너무도 많이 먹어서 이제는 쳐다보기 싫다는 것이었다. 지금에야 적당히 톳향이 배어들고 오독오독 씹히는 식감을 살리는 정도로만 톳을 넣어 만들어 먹지만, 먹을 것이 넉넉지 않았을 시기, 보리보다 더 많은 양의 톳을 넣어 밥을 지어 먹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어른들에게 톳밥은 그리 반갑지 않은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톳보리밥을 먹으면 화장실 가는 일이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넉넉지 못했던 시절의 기억이 있는 밥이라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라고 손사레를 치실 정도이니 요즘 우리 세대가 생각하는 영양만점 톳보리밥은 그 시절 톳밥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많은 제주의 어르신들은 보리밥과(물론 쌀보리밥) 조팝(조밥)이 주식이었다고 말씀해주셨다. 또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보리를 가장 많이 수확한 지역이 제주라고 하니 보리가 전근대 시대의 제주의 주곡 중 하나였던 것은 확실하다. 풀기가 없어 흐트러지며 입안에서 겉도는 보리보다는 찰기 가득하고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하얀 쌀밥이 너무 귀했던 기억이 있는 제주의 어르신들에게 보리밥은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밥인 동시에 어려웠던 시절을 대변하는 음식인 것 같다.

실제로 요즘의 제주의 봄 풍광을 살펴보면 곳곳에서 청보리가 넘실대는 것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지역마다 심는 시기가 조금 달라 현재 노랗게 익어가는 곳도 있고 아직도 쨍한 녹색을 자랑하며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파도처럼 일렁이는 보리바다밭 풍경인 곳도 있다.

사진=김진경.
보리밭. 사진=김진경.
사진=김진경.
보리. 사진=김진경.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제주의 어른들은 보리가 익어갈 때 즈음이 자리가 가장 맛있는 시기라고 입을 모아 말씀하신다. 흔히, 자리물회를 제주의 여름철을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자리물회의 시작은 보리가 익어가는 4월 중순 이후부터이다. 산에 있는 제피나무도 겨우내 웅크리고 있었던 제피잎이 그 특유의 싱그러운 향을 내뿜고 있다. 집집마다 꼭 심었다던 우영팟의 제피나무는 또 어떠할까. 한치물회는 아니더라도 자리물회에는 제피잎이 빠지면 섭섭하다. 쉰다리식초와 제피잎이 빠진 자리물회는 허전해도 너무 허전하다. 사실 지금에야 대기업에서 만든 식초로 많이 대체하지만 우리 할머니 세대들은 쉰다리식초 아니면 식용빙초산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리의 정식 명칭은 “자리돔”이다. 고작 어린이 손바닥 크기의 조그만 물고기인데 돔이라는 귀한 생선대우를 받고 있다. 도미과의 생선들은 우리나라와 일본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많고 고급생선으로 환대를 받는다. 그러나 자리돔의 경우에는 같은 돔이지만 처지가 조금 다르다. 육지나 일본에서는 도미과 생선 중 가장 볼품없고 씨알도 작아 생선 취급을 거의 하지 않는다. 거무튀튀하고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기도 한단다. 하지만 그런 자리돔이 제주에서는 그나마 돔 다운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왜일까? 

제주의 자리돔 하면 보목리의 자리와 모슬포 자리가 양대 산맥처럼 사람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사실 이 두 지역에서만 자리가 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자리가 잡히나 특히 이 두 지역이 자리돔의 서식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지역들에서는 자리돔축제를 열기도 한다. 보통 보목리는 바다가 잔잔하여 보목리 자리는 뼈와 가시가 연하고 크기가 작은 편이라 물회나 강회로 먹는 것이 좋고, 거칠고 센 조류를 갖고 있는 모슬포의 자리는 구이용으로 먹는 것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사실 학창시절 자리를 싫어했었다. 그 시절에는 생선을 요망지게 발라 먹지 못했었고 굵은 소금 뿌려 구워 낸 자리구이나 조림은 몇 번 젓가락을 들썩이면 몇 점 건지지도 못해 내 노동력 대비 얻을 수 있는 살코기의 양이 너무 적어 손이 가지 않던 생선이었다. 유난히 억센 모슬포 자리의 뼈는 회로 먹거나 물회로 먹을 때도 불편해 자리의 맛이 나에게는 그렇게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었다. 그리고 일단 다른 생선은 횟감으로 손질하면 생선의 형체를 알 수 없어 눈으로 보기에도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은 반면, 자리물회의 자리는 딱 봐도 몇 등분으로 나뉘었는지 가늠이 되어서 부담스러웠다. 뭐 옥돔은 지금이 제철이었어도 워낙 귀했던 생선이라 일상 식탁에 올라오기가 쉽지 않았던 터라 옥돔구이는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고 차라리 기름진 고등어를 구워 밥상에 올려주면 오히려 그게 더 행복했었다.

사진=김진경.
자리. 사진=김진경.
사진=김진경.
자리물회. 사진=김진경.

제주음식에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제주의 어린이들에게 제주음식수업을 시작했을 무렵, 나는 제주음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조선시대 한 ‘사건’과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출륙금지령”이다. 고려부터 이어진 진상문화, 즉 지역의 특산품을 왕에게 진상하는 제도가 조선으로 들어와 더욱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주에서는 특히 전복과 귤 진상으로 인해 민초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수업을 갓 시작했을 당시에는 제주에 전복을 따는 포작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남성들이 따로 있었던 사실도 몰랐었다. 

진상에 대한 고됨과 수탈에 가까운 관리들의 횡포에 힘들어진 제주사람들은 몰래 제주도 밖으로 배를 타고 떠나게 된다. 이렇게 제주를 떠나간 젊은 남자들 중에는 거친 바다 밑으로 들어가 전복을 캐던 포작인들도 다수 있었을 것이다. 포작인이 줄어들면서 여성들이 전복의 공출량을 맞추기 위하여 바다 아래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제주의 해녀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제주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수가 적잖아 진 탓에 진상품 공출량을 맞추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자 조선은 제주사람들이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1692년 출륙금지령을 내린다. 이 때문에 민간인들은 배를 소유하지도, 배를 타고 섬 밖으로 이동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오로지 제주와 육지를 연결하는 배는 관선 뿐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출륙금지령은 200여년이라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 때문에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해상교류를 통해 무역을 했던 탐라사람들의 배를 만드는 기술도, 배를 운항하는 기술도 점점 희미해지게 만들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출륙금지령은 약 200년이라고 알고 있지만 정확히 몇 년도에 출륙금지령이 해제가 되었는지는 그 정확한 기록이 없다. 감안하더라도 통상 200년 동안 그 세월 속에서 어로기술이 쇠퇴하면서 제주 사람들의 음식문화도 적잖은 변화를 겪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때문에 제주 사람들은 테우라 불리는 뗏목을 타고 근거리에서 잡힐 수 있는 생선만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테우를 이용해 주로 잡았다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생선은 대표적으로 자리와 멜이 있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에게는 자리돔은 참 귀하고 중요한 생선이었다.

나는 당연히 제주가 섬이기 때문에 전근대 이전 과거에도 제주의 주된 1차 산업은 수산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긴 기간 동안의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제주는 농업에 기반을 둔 섬이 되었다. 농업에 크게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어로기술과 관련된 기구들 보다는 농기구의 종류와 기술이 훨씬 다양하고 발전했다. 농기구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소와 말은 제주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했다. 물론 육지에서도 소와 말이 중요하지 않았겠냐마는 태풍의 길목에서 그 험난한 태풍을 맞이하고 있는 제주사람들은 여름철 힘들게 파종한 작물이 태풍에 쉽게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풍이 휩쓸고 간 이후에도 다시 파종할 수 있는 씨앗과 노동력이 언제나 필요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주 사람들이 소와 말을 함부로 잡아 먹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제주가 농업을 매우 중시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제주의 또 다른 주곡인 조에 비해 태풍이 오기 전, 바로 이 시기부터 수확이 가능했던 보리는 제주 사람들에게 정말 중요한 곡식이었다. 늦봄에 수확하여 겨우내 아껴서 먹는다고 해도 분명 보리파종 즈음 되면 쌀독에 보리쌀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보리쌀을 아끼기 위해 고구마나 감자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고 무도 많이 넣어 밥을 지었을 것이다. 톳도 보리의 양 만큼이나 넣어 밥을 먹어야 할 만큼 힘든 춘궁기가 있었다. 이 시기에 작년 수확한 보리가 동이 나 버리면 익지 않은 석보리를 익혀서 먹기도 했었던 세대가 현재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먹을 게 없다고 투덜대는 자리돔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맛있고 소중한 생선 일 것이다. 마을 어귀에 자리장수가 들어오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어머니도 자리를 한 바가지 사시지는 않을까 설레 했던 아이들이 지금의 제주를 묵직하게 받치고 있는 제주 어른들이 되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자리돔은 보리수확 때가 가장 맛있다.”라는 말은 단지 정말 자리가 제철이라서 맛있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한참 전에 밑바닥을 보인 보리쌀독이 이제 곧 자리돔을 만나기 시작하면 가득 채워질 수 있다는 행복함과 희망에 아마 자리돔은 먹을거리 이상의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리돔 뿐일까, 보리탈, 보리콩 역시 곧 다가올 보리수확 전 미리 받는 선물처럼 제주사람들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보목리까지 찾아가 자리물회를 먹었다. 제주의 물회는 된장이 베이스다. 고추장을 넣어 만든 물회는 최근 변형된 물회이고 원래 제주 사람들은 된장만 풀어 물회를 만들어 먹었다. 노란 된장물에 뼈가 잘 발린 자리돔과 싱싱한 야채들, 여기에 식초를 약간 넣고 제피잎을 가득 넣어 뜨거운 밥을 말아 한 술 떠 입에 넣어보았다. 이제까지 내가 생각했던 자리물회 맛과는 또 다르게 다가왔다. 막걸리 한 잔과 함께 먹은 자리물회는 너무나 매력적인 맛이었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입맛이 변해, 이제야 나도 제주 어른들이 좋아하는 “제주어른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된 것이다.

사진=김진경.
자리물회와 자리구이. 사진=김진경.

얼마 전 서울 출장을 다녀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말 오랜만에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공항에서 버스에 타고 스크린에서 제공하는 제주관련 정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제주국제공항이 세계 공항 중 이용률 1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로소 주위를 보니 제주의 봄을 만끽하러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정말 많음을 깨달았다. 청보리가 넘실대는 아름다운 제주의 봄을 관광객들과 젊은이들은 그저 낭만과 행복의 기억으로만 기억할지 모른다. 

이번 보리철은 나에게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올해 보리철에는 좀 더 많은 제주의 어르신들을 만날 계획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한 제주의 보리의 이야기는 어르신들의 기억에 얼마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내년의 보리철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사진=김진경.
ⓒ이로이로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