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조작사건 피해자 지원조례’ 발의에 부쳐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한 기억 공간 '수상한 집'(위 왼쪽), 재심 끝에 간첩 누명을 벗었지만 이듬해 세상을 뜬 고(故) 오재선 할아버지(위 오른쪽), 유신말기 대규모 재일동포 간첩단 검거 소식을 다룬 1977년 3월24일자 경향신문 보도(아래 가운데). 간첩단  사건 역시 조작으로 밝혀졌다. <그래픽=문준영 기자>

“과거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

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양로원으로 발길을 돌리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덤덤한 듯한 말투가 외려 먹먹함을 더했다. 간첩 누명을 벗은 직후였다. 

고(故) 오재선 할아버지(1941년생). 간첩으로 몰려 1986년 구속된 그는 30여년이 지난 2018년 8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복역 기간은 5년2개월. 특사로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그때 오른쪽 청력도 잃었다.

뒤집어쓴 것이긴 해도, 혐의 자체가 우스웠다. 조총련의 지령을 받아 수집했다는 기밀은 다음과 같았다. 제주지역 비료가격 인상, 5.16도로 기밀, 애월읍 시외버스정류소에서 판매한 전국 교통시간표…. 아무리 봐도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출소 후 홀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던 할아버지는 고문으로 얻은 병이 깊어지자 2005년 스스로 요양원으로 향했다. 이후 할아버지의 단 한가지 소원은 죽기 전에 억울함을 푸는 것이었다. 이는 곧 누명을 벗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거짓말처럼, 할아버지는 소원을 이룬지 꼭 1년만인 2019년 8월 세상과 작별했다.  

자신에게 실형을 선고한 양승태 당시 재판장(전 대법원장)을 향해 “자기반성 뒤 새로 태어나라”던 할아버지의 준엄한 꾸짖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따지고 보면, 간첩으로 몰린 제주인들의 참혹한 삶은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인 4.3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주로 일본이 공간적 매개로 등장했다. 살육의 광란을  피해 이국땅으로 떠난 도민과 그 자제들을 군사독재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한 표적으로 삼았다. 권위주의 시절 공안당국이 조작한 재일동포 간첩 사건에 유독 제주인이 많이 연루된 것도 이 때문이다. 

2006년 천주교인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전체 조작간첩사건 109건 가운데 34%인 37건의 당사자가 제주출신으로 나타났다. 4.3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제주도민들로서는 이중의 고통을 당한 셈이었다. 

강광보 할아버지(81)도 그런 경우였다. 4.3 당시 일본으로 피신한 아버지를 만나러 1960년대초 밀항을 택한 게 화근이었다. 현지에서 제주 여인을 만나 아이까지 낳았으나 1979년 당국에 적발돼 제주로 강제 추방됐다. 고향으로 되돌아온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그에게는 간첩이란 딱지가 붙었다. 숙부가 조총련이니 간첩지시를 받지 않았느냐는 거였다. 65일을 경찰서에 갇혀 고문에 시달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7년 후인 1986년 다시 경찰에 끌려가 같은 내용으로 고초를 겪었다. 가족까지 협박을 받게되자 할아버지는 허위 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징역 7년. 할아버지는 2017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았다. 31년만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았던 제주시 도련동 자택은 개조 과정을 거쳐 2019년 전국 처음으로 조작간첩을 비롯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기억 공간’(일명 ‘수상한 집’)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유신 말기 제주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은 저물어가는 정권의 단말마적 발악의 극치였다. 

1977년 언론들은 북괴의 지령을 받은 가짜 재일동포 사업가, 이른바 거물급 간첩이 검거됐다고 대서특필했다. 당시 61세인 서귀포시 회수동 출신의 강우규씨였다. 강씨의 친동생을 비롯해 검거된 인원만 11명에 달했다. 이중 10명이 제주출신이었다. 제주교육대학교를 설립하고 1, 2대 학장을 지낸 김문규씨, 현직 국회의원의 비서 출신 인사도 연루됐다. 강씨와 김씨는 초등학교 1년 선후배 사이였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이들은 구타와 전기고문, 물고문 끝에 중앙정보부가 부르는 대로 일본에서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고 진술했다. 강씨는 사형, 나머지 10명에겐 징역 1년6월에서 5년이 각각 선고됐다.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1988년 특별사면이 이뤄졌다.

이들은 재심을 거쳐 2016년 6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고, 일부는 국가배상 판결까지 받아냈으나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강씨는 2007년 일본에서, 동생도 4년 후인 2011년 눈을 감았다. 이보다 앞서 김씨는 형을 살고 나온 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야만의 시대 희생양인 이들을 과연 누가 보듬을 것인가.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들의 삶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졌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그게 정상이다. 4.3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시간은 제 편이 아니다. 

바야흐로 화해와 상생의 시대다. 4.3의 경우만 해도 전향적인 판결과 정부 조치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올해 전면 개정된 4.3특별법이 대표적이다. 최근 제주도의회 강성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제주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등의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이 공적인 책임을 공론화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