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71) 그래서 늦는 것들/ 류미야

소멸의 자리에 열린 열매. ⓒ제주의소리
소멸의 자리에 열린 열매. ⓒ제주의소리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혹은 한자리에서 잊히기나 하는 지요
날리는 저 꽃잎들 다 겨울의 유서인데요
 
그런 어떤 소멸만이 꽃을 피우나 봐요
사랑을 완성하는 것 물그림자에 비친
언제나 한발 늦고 마는
깨진 마음이듯이
 
철들고 물드는 건 아파 아름다워요
울음에서 울음으로
서로 젖는 매미들
제 몸을 벗은 날개로 영원 속으로 날아가요
 
폐허가 축조하는 눈부신 빛의 궁전
눈물에서 열매로
그늘에서 무늬로
계절이 깊어갈수록 훨훨
가벼워지네요

-류미야, <그래서 늦는 것들> 전문-

‘겨울의 유서’를 받들고 피었던 꽃 진 자리에 어느새 단단한 열매가 맺혔다. 소심한 발걸음으로 찾아온 봄 햇살에도 볼이 터질 듯 아름다움을 뽐내며 피어나던 꽃이었다. 세 살짜리 아이의 빨간 볼처럼 앙증스럽게 피던 꽃은 점점 더 힘을 키운 봄 햇살 속에서 이승의 손을 놓았다. 상향과 하향이 공존하는 딱, 그 어느 지점, 다른 차원의 문 하나가 열린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버리고 또 다른 세계를 펼친다. 소멸의 완성은 새로운 탄생이라고 했다. 꽃 진 자리에 자리 잡은 열매는 꽃이 지는 걸 아쉬워하던 마음이 무색할 만큼 아름답다. 하나의 세계가 소멸하면서 완성시킨 마지막 손길이 아름다움의 절대성을 건드려 깨웠나 보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절대성을 드러내며 자라난 또 하나의 세계는 어느 순간 다시 ‘영원 속으로’ 날아갈 것이다. 이 순환의 고리를 알고 있음에도 우린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대상연속성이 부족한 아기들처럼 오고 가는 것들에 대해 감정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제법, 녹음이 우거졌다. 시작과 끝이 한 점에 있는 원처럼, 그 둥근 고리의 어느 지점을  우리는 지나고 있는 중이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충돌하면서 평행을 유지하는 우주의 진리 앞에서도 우린 ‘훨훨 가벼워’지지도 못하고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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