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자주독립-민족통일은 현재도 유효한 염원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해마다 4월이면 제주도민들이 시린 가슴 부여안듯 광주시민들도 5월이면 심한 가슴앓이를 한다. 정부에서는 4월3일을 희생자추념일로, 5월18일을 민주화운동기념일로 지정해 제주4.3과 광주5.18을 대한민국 역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두 사건은 그 자체로도 참혹했지만, 그 후에 그 진상을 세상에 드러내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도 항쟁이라 할 정도로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그 진상들은 아직도 완전히 규명되지 못했으며, 깊은 상처는 아물지 못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제주4.3과 광주5.18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정치사적으로 4.3은 일본제국 패망으로 자주독립 열기가 뜨겁던 해방정국에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5.18은 박정희 유신독재 붕괴로 민주화 열망이 뜨겁던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 독재정권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4.3은 1947년 3월1일 완전한 통일독립을 이루자는 시위에서 시작해 1957년 4월2일 마지막 유격대원이 생포될 때까지 10년간 지속됐다. 그리고 5.18은 1980년 5월17일 신군부의 계엄확대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해 5월27일 계엄군의 진압으로 10여일 만에 종료됐다. 이외에도 사망자, 행불자, 부상자, 유족 등의 규모에서도 두 사건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광주5.18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79년 10월 18년 장기집권을 하던 박정희 유신 독재체제가 무너지고 1980년 봄이 되자 대학캠퍼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민주정부를 수립하려는 꿈이 무르익고 있었다. 반면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그러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새로운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광주는 이른바 제5공화국 탄생의 희생양이 됐다.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전두환 정권(1980~88)은 끝이 났고, 1988년 국회에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되면서 5.18의 진상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문민정부(1993~98)가 들어서자 5.18학살책임자들은 내란혐의로 기소되고, 대법원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17년 형벌을 확정했다. 국민의 정부(1998~2003)가 들어서면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법률들이 제정돼 관련자에 대한 보상과 예우가 이뤄졌고, 2011년 5.18민주화운동 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5.18 진상을 규명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과정은 제2의 5.18항쟁이라 할 만큼 피와 눈물이 요구됐다.
  
이에 비하면 제주4.3에 대한 진상규명이나 명예회복 등은 더욱 더디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한반도를 유라시아대륙을 향한 길목으로 지목하고, 특히 제주섬을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 지긋지긋한 일제강점에서 벗어난 우리에게 한반도 분단과 친일파를 등용하는 미군정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남북분단을 반대하고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는 것은 민족 모두의 염원이었다. 그러기에 외세배격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1947년 3.1절 시위는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뒤이은 제주3.10총파업에 당시 도청직원, 기타 관공서와 업체 공장에 이르기까지 160여 기관 단체 종사자 4만여명이 동조 참여했다. 그만큼 제주도민들의 자주독립 의지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다.
  
제주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주목하는 미군정은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제주도를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강경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미국의 적극적 지원으로 탄생한 이승만 정권은 500명의 인민유격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3만여명에 이르는 제주도민을 희생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으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고 반공이념으로 무장한 정부는 연좌제 등으로 제주도민을 불온시하고, 4.3유족과 도민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4.3으로 부상을 당하고 부모와 자식을 잃고 무고하게 빨갱이와 폭도로 낙인찍혀 아무 말도 못하던 그 고통과 아픔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헤아리기조차 힘들 것이다.
  
제주4.3 추모제가 공개적으로 처음 열린 것은 사건이 발생하고 40여년이 지난 뒤였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시기에 4.3이야기를 채록하고, 세상에 알리고, 연구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고, 제2의 4.3항쟁이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국민의 정부에서 4.3특별법이 제정되고, 참여정부(2003~2008)에서 4.3진상보고서가 발간되고 국가폭력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가 있었다. 그리고 올해에 4.3특별법 전부개정안이 공포되어 4.3의 진실이 추가로 밝혀지고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상처 치유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제주4.3연구소 30년사의 표제처럼 ‘폭압을 넘어 침묵을 넘어’ 캄캄한 밤길에 등불이 되어준 현길언, 양조훈, 고창훈, 김창후 등 초창기 제주4.3운동의 선각자들과 당시 제주4.3운동의 물꼬를 튼 청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완전한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의 염원에서 시작된 제주4.3의 진실을 밝히고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하기란 쉽지 않다. 4.3은 미국과 대한민국 정부의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이고, 제주도민들로서는 아프고 슬픈 역사이다. 하지만 밝고 자랑스러운 역사만이 아니라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도 소중한 우리의 역사이다. 광주5.18 명칭이 ‘광주5.18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되었고, 광주5.18정신이 ‘민주, 인권, 평화, 정의’로 모아지고 있다.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교수. ⓒ제주의소리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교수. ⓒ제주의소리

우리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고 남북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4.3정신과 공식명칭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제주4.3의 정신과 ‘바른 이름[正名]’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70여 년 전 제주섬에서 외세를 배격하고 분단을 반대하며, 탄압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양민학살이 자행된 제주4.3에는 자주독립, 지역자치, 민족통일, 평화인권의 염원과 의지와 정신이 깃들어 있다.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은 70여 년 전 과거사가 아니고 현재도 유효한 염원이며 언젠가는 실현해야 할 미래의 과제이다. 우리가 어둡고 아픈 역사를 드러내고,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또 다시 그러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다. / 윤용택 논설위원·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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